#서열문화 #나이주의 #호칭문제
전 세계의 언어들을 연구한 결과, 207개 중 7개 언어만 2인칭 대명사를 호칭으로 못 쓴다고 한다. 너를 너라고 말 못 하는 한국에서는, 관계가 정립되지 않은 상태로 상대를 You(너, 당신)이라고 부른다면 결투 신청과 비슷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인은 많은 상황에서 상대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불안해한다. 이름 앞에 직급이 달려야만 서로를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관계 그 자체보다는 위아래를 따지고 정의하는 것에 기본을 두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룰이다. 내가 외국인이라면 상대방을 호명하는 것을 아예 포기했을 것 같다. 자신을 ‘오빠’라고 칭하는 놈부터, 남편이나 애인을 ‘오빠’라고 부르고 소개하는 여성, 진짜 오빠older brother의 수많은 현현이 모두를 혼란케 한다. 결국 애초에 '당신, 너'를 정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관계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래서 초면에 몇 년생이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사실 그전에는 서로의 액면가를 지레짐작할 뿐이다. 그러다 '몇 년생이세요?'로 시작해서 ‘형이시네요(초면임)' 혹은 '우리 친구네요(좆도안친함)' 까지의 코리안 스몰톡을 마친 후에야 긴장을 풀고 화끈하게 서열질을 해줘야지만, 포차에 가서 형동생으로 술을 깔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 같다.
당연하겠지만 한쪽을 높여야 하는 관계에서는 서로 될 일도 안되게 만든다. 대표적으로 대한항공도 기장에게 존댓말을 하니 어쩌니 하다가 제대로 소통이 안 되어 결국 추락한 사고를 꼽을 수 있다. 그 이후로 조종석에서는 영어만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때 50명 정도가 이에 반발해서 회사를 떠났다고 한다. 또한 여객기 비상착륙 시 매뉴얼도 ‘머리 숙여’라고 반말로 지시하게 되어 있다. 당연하게도 차분한 존댓말로 할 때 보다 탈출시간이 30초 정도 줄었다고 한다.
글로벌 규칙을 제껴도 뭔가 이상한 점은 한 둘이 아니다. 미국에서 한국인과 미국인이 시비가 붙었는데, 한국인이 갑자기 단호한 톤으로 "How old are you!(나이가?)"나 "Do you know how old I am!(제가 몇 년식인지 아시나요?) "을 말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처럼, 한국식 관계설정에는 대단히 독특한 점이 있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수평적 문화를 지향한다고 영어이름을 도입한 회사에 등장한 에릭부장님과 클로이대리님이 한 트럭으로 와도 바꿀 수 없는 한국적 문화의 근간을 형성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언어 구조는 태어나자마자 겪는 하나의 사건이다. 이제 갓 말을 하기 시작한 애한테 반말로 말을 가르치면서 존댓말을 하라고 시키는데, 말은 원래 상대적인 것이어서 한쪽을 올리면 반드시 한쪽은 내려간다. 어린애한테 어른을 공경하라고 하면, 걔는 본인이 어리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자연스레 자신을 낮추게 된다. 유교에서도 장유유서라고만 하지 '어른이랑 애 둘 다 똑같이 존중해야 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반드시 윗사람 취급해야 한다는 반복적 학습은 그 반대 취급에 무의식적으로 동의하고 수긍하며 자라게 되는 효과를 낳는다.
우리는 ‘아들, 딸(꼭 이 순서여야 함)’로 호명되는 것이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게 의미라는 것을 가지기나 하는지조차 모를 수도 있다. 왜냐면 그냥… 너무 당연하게 그리고 너무 오래 전부터 그랬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아들’이라는 대명사는 ‘우리 딸’보다 압도적으로 선택적이며 기능적인 역할을 한다. 그 결과로 남성은 소멸되고 아들만 남게 되었다. 군복 입은 남자를 아들 같다고 하거나, 모르는 군인을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반증이다. 저런 호칭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한, 이 땅에서 남성은 언제나 아들이고 여성은 엄마가 되거나 아직 되지 못한 사람일 뿐이다. 군입대한 성인 남성이 불쌍한 남자아이로 생각되면 본인은 자아를 잃고 그를 애틋하게 생각해야 하는 모부의 역할을 흡수한 것이다. 타인을 타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은 본인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한 채 남이 불러주는 대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하며 평생을 산다.
나 빼고 다 You인 세상을 상상해 보았는가? 아니면 상상하기 어려운가? 옆집 개도 You이고, 교감선생님도 You이고, 앤드류부장님도 You이다. 이 차이가 바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를 형성한다. 나 빼고 전 세계의 모든 것들은 다 You니까 애초에 나는 누군가의 하위존재이거나 상위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You의 세상에서는 친구가 그냥 친구고 Friend이지, 빠른년생 같은 잡도리를 고려하지 않는다. 친족도 아니면서 서로를 형, 언니, 친한 동생, 아는 동생으로 부르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이유이므로.
이름을 잃고 산발하는 타인을 정의하고자 할 때 비로소 호칭은 역할을 분배하며, 그 연결 안에서 서로의 무의식에 가담하고 부역한다.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 언어가 문화를 지배했듯이, 내가 사용하고 듣는 말은 생각과 자아를 지배한다. 우리는 각자의 이름을 수납한 채로 너무 오랜 시간을 살고 있다. 이름을 대신한 말들이 날고 기어서 나를 감히 정의하게끔, 그것을 길에 돌아다니는 나방만큼이나 무자비하게 살려두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과연 내가 삼킨 호칭을 의식 밖으로 꺼내놓는 행위를 통해, 내가 수렴한 모든 언어들이 내 자아에 총을 겨누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언어의 탈피가 무기를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국어를 냅두고 굳이 다른 말을 배운다는 것이 왜 중요할까? 당신이 언어를 사용할지언정, 언어가 당신을 사용하게 두지 말라는 의미에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