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하고 뒤처진 것 같으세요?

우울증 이야기 (5)

by 돌만두



심각한 활자 중독이었습니다. 저는 정신이 안 좋을 때 어딘가에 갇혀 활자를 폭식하는 버릇이 있거든요. 거의 세상을 뜰 뻔했던 해가 3년이 다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실패했지만요. 그때는 한창 ‘무의식과 자유의지’ 같은 주제에 빠져 있었는데, 론다 번의 시크릿, 바딤 젤란드의 리얼리티 트랜서핑으로 시작해서 다중우주와 탄트라, 카르마를 다룬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2022년은 그렇게 ‘다소 영적인’ 자기 계발서에 중독된 채로 보냈습니다. 끊임없이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심지어 난 내가 사람이 맞는지조차 의문스러운데 사회에서 마주치는 다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 알 필요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게 신기했거든요. 그 해 읽은 책들은 인간이 의식에서 자유로워지고, 원하는 바를 이루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전부 떠오르진 않지만 말하는 내용은 대충 비슷했는데, 오늘 하루에 감사하며 될 때까지 그런 척(fake it until you make it)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믿기 등등… 이제 자기 전에는 꼭 감사 일기를 쓰자고 작정했습니다.



예상대로 감사 일기를 쓰기 시작한 일주일 만에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만성적으로 우울한 인간이 감사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는 순간은 내 현실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확인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나는 오늘도 숨을 쉬고 있어(원하지 않았음에도)”, “오늘도 운동을 했어. 내 두 다리는 튼튼해(그닥 예쁘진 않음)”, “오늘은 날씨가 좋았어(내일은 좆같겠지만)”. 이런 내용을 적었던 것 같습니다. 쓰면서도 부지런히 토를 달았습니다. 당시는 정말 죽고 싶었기 때문에, 제정신으로는 고마워할 만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기만 할 뿐이었죠. 그 충격은 아직까지 생생합니다. 다른 날 몇 번이고 ‘제대로 된 감사’를 해 보려고 시도했지만 감사할 일을 찾지 못하는 나, 어떤 것에도 진심으로 고마워하지 못하는 나에 대한 양면적인 자기 비난으로 돌아왔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해서 오늘 하루도 불만투성이인 어른이라니…



지금 그 모든 좌절을 겪었던 당시의 내면을 돌아보면 짠한 마음이 듭니다. 너무도 애쓰고 있었거든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우울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아무리 우울해도 끼니를 거르면 배가 고팠고 손톱의 흰 부분은 계속 길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상태의 나를 살아있다고 해도 될지 의심스러웠습니다. 때때로 육체의 생명력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벅차게 느껴집니다. 어떠한 생의 유의미도 납득되지 않는 상태로 세탁기를 돌리고 샤워를 하는, 그냥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들이 폭력적일 만큼 버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도 출근을 하고 운동을 했습니다. 자꾸만 죽어버리는 정신을 어떻게든 살아있는 육체에 매 놓아야 하기 때문에...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신이 자꾸 자살을 합니다... 머리 한쪽은 그 나이 먹고 이룬 것 하나 없으면서 우울증 핑계를 대는 거 아니냐고 몰아붙였고, 나머지 한쪽은 이 모든 고통은 죽어야 끝나니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말하더군요(소소한 일상에 감사하는 일이 어떤 이들에게는 정말로 어려운 일일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무력한 1월의 태양 아래에 있던 날이었습니다. 쉬는 날 평소처럼 옷을 껴입고 강변을 뛰고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십 분쯤 뛰었을 때 갑작스레 몸이 붕 뜨면서 “나는 마땅히 해낼 일이 있어서 이 우주에 온 거야”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마치 내 목소리를 한 신이 나의 머리맡에서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해 주는 것처럼 자비롭고, 따뜻하고, 강렬한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언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분명 부인할 수 없는 거대한 확신이었습니다. 내 몸이 신의 한가운데 있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날아가듯 한참을 달리며 아무 생각 없이 이 황홀한 깨달음을 침묵으로 곱씹었는데, 이게 당시 러너스 하이인지, 영적 깨달음인지, 경조증 증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깨달음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지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 신비한 경험에 대해 꼭 말하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쓰는지 모릅니다. 살다 보면 가끔 이런 순간이 오는 듯합니다. 이런 걸 겪는 사람이 조금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무슨 상관인가요. 각자의 우주를 가지는 것은 4차원이라고 놀림받을 일도, 주눅 들 일도 아닙니다. 어차피 진정한 선(禪)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도 대부분의 타인들은 당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감사 일기가 알려준 것은 ‘모든 것에 감사하는 법’, ‘감사할 것을 찾아내는 능력’이 아니라 주어진 삶이 있다면 감내해야 한다는 선명한 진실이었습니다. 제가 하는 느린 달리기처럼요. 저뿐일까요? 세상에는 인간으로 태어나 치타보다 빠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매일 뛰는 마라톤 선수가 있습니다. 공놀이는 어떤가요. 인생을 바쳐 축구공을 차는 선수들이 있고 그들의 경기를 보면서 울고 웃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부질없는 것처럼 보여도 삶은 각자 만들어낸 우주의 질서대로 흘러갑니다. 이 은하의 하루엔 수십억 개의 울음, 수억 개의 탄생, 수천 개의 이별이 있을 텐데 오늘의 궂은 기분에 아쉬워해서 뭐할까요. 모든 순간은 한 번 뿐이고, 그 순간들과 싸우지 않고 해내야 할 일을 하려면 ‘철저한 수용’이 있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삶에 온전히 머무르기 위해 기억하고 싶은 세 가지를 말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저는 제게 일어난 좋지 않은 일, 감사할 수 없는 날들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수용하는 것의 목표는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발 디딘 현실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절대적으로 나쁜 일, 절대적으로 좋은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이해했을 때면, 이 세상에는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고 오로지 영원할 거라는 믿음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어렸을 때는 꽤 예쁘다는 말을 들었지만 지금은 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닮고 싶은 연예인의 사진을 보니 문득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지 않는 내 모습을 싫어한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이 되나요? 못생긴 나, 예쁜 나, 젊은 나, 늙은 나를 판단하는 존재는 누구인가요? 나를 떠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하늘이 무너진대도요. ‘받아들임’은 나의 믿음이 빚어낸 가치판단과 기대, 현실을 조율하고 통합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놓아주어야 합니다. 감사하지 못할 일들, 운이 나빠서 일어난 일들을 괜찮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무언가를 완전히 수용하는 것은 생각해서 이해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인생의 불확실성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기 때문에, 타인의 세계와 나의 미래는 어느 잘난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예시로 오늘 갔던 카페 직원의 말투가 무뚝뚝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무시당했다는 생각’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왜 무시당했지?’, ‘내가 만만해 보여서?’라는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마치 실제로 무시를 당한 것처럼 기분이 나빠집니다. 생각은 현실과 별개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놓아주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은 흘러가는 시간에 놓아주세요.



세 번째는 이 두 가지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 인해서 가까스로 별 볼 일 없는 일상을 영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살아가는 일은 결코 부끄럽거나 민망한 것이 아닙니다. 당장 회사에서 망신을 당했어도, 시험 결과가 좋지 않아도, 자랑할 만한 성과가 없어도 어떤가요. 기억하세요. 이 모든 고됨은 분명 당신이 진정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매일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보다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덧붙이자면 누군가를 나를 미워해도, 또는 다른 이가 미워 죽겠어도 결국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나의 우주에서 타인의 삶은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철저한 수용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며 내 정신과 몸을 붙잡고 온 힘을 다해서 하는 것입니다. 몇 번을 실패하고 넘어져도 계속하고,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선 이해하고 수긍할 몫이 있음을 이해하세요. 다리가 잘 안 움직인다고 없애버릴 것처럼 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 우울해도 괜찮습니다. 죽고 싶어도 괜찮습니다. 살아있으면 언제든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동안 많이 애쓰고 고생했어요. 당신은 게으르지 않습니다. 실패에 비겁하지 않습니다. 그저 존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