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못 믿겠을 때
살짝 주눅이 들 정도였어요. 그녀의 자기소개서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거든요. 솔직히 말했어요. "제가 만약 면접관이라면 뽑을 것 같아요." 늘 무표정하던 그녀의 얼굴에 한 순간 햇살이 지나가대요. 기쁨을 넘어 감격한 표정이었어요. "정말요 선생님? 그런데 왜 매번 최종 면접에서 떨어질까요?" 탈락을 말하자 금세 다시 그림자 진 얼굴. 그날 이후 매 수업마다 저는 그녀를 관찰했어요. 왜 떨어지는지 그 답을 꼭 찾아주고 싶었거든요.
자질은 충분했어요. 시선은 따뜻했고, 귀는 질겼어요. 원석이 아니라 이미 잘 다듬어진 보석이었어요. 저보다 훨씬 더 좋은 기자가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죠. 그런데 정작 본인에겐 그런 확신이 없더라고요. 제 글쓰기 수업은 수업 전 미리 제출한 글을 익명으로 스크린에 띄우고 저와 수강생이 함께 피드백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자기 글이 스크린에 등장하면 그녀는 마치 자기 글이 아니라는 듯 가장 먼저, 가장 매섭게 본인의 글을 난도질했어요. 그녀의 글이 가장 훌륭했을 때조차도요.
'그녀에게 부족한 건 딱 하나, 자신감뿐이다.' 결론을 내린 저는 나름의 전략을 짰어요. 자신감이란 그런 거잖아요. 남이 아무리 "자신감을 가지세욧! 당신은 이미 훌륭하다구욧!!"이라고 말해줘도, 자기 안에서 스스로 자라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 그래서 '넛지(nudge-옆구리를 쿡 찌른다는 의미로, 간접적인 개입으로 더 좋은 선택을 유도하는 방법)' 전략을 쓰기로 했죠.
"요즘 무슨 책 읽어요? 나는 이거 읽는데…" 강의 쉬는 시간, 민트색 표지를 입은 책을 가방에서 반만 꺼내 슬쩍 보여줬어요. <나는 오늘부터 나를 믿기로 했다>(이 책의 유일한 단점은 너무나 자기 계발서 같은 제목입니다)라는 책이었어요. 목마른 그녀라면 이 정도의 넛지만으로도 도서관으로 달려갈 거라 예측했죠.
예상은 맞아떨어졌어요. 1주일 후 그녀는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책 다 읽었어요. 지금까지 꼭 가스라이팅(타인에 의해 교묘하게 지배당하는 심리현상)당한 기분이에요."
성 중립적인 제목과는 다르게, 이 책은 '여성의 자신감'을 정조준하고 있어요. 여성이 남성보다 자신감 부족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고, 이 같은 심리상태가 '성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에요.
실제로 하버드 대학에서 이런 실험을 했대요. 아시아계 미국인 여대생 46명을 세 그룹으로 나눠 각기 다른 설문을 했어요. 첫 번째 그룹을 대상으로는 '아시아계는 수학에 강하다'는 점을, 두 번째 그룹에는 '여성은 수학에 약하다'는 고정관념을 상기시켰고 세 번째 그룹은 정확한 비교를 위해 중립적인 질문을 했죠. 그런 후 수학 시험을 쳤어요. 결과는 어땠을까요?
'아시아계=수학 유능' 질문을 받은 여학생들은 100점 만점에 54점을 받았지만, '여성=수학 무능' 질문을 받은 여학생들은 43점에 그쳤어요. (중립적 설문지를 받은 그룹은 평균 49점이었어요) 몇 개의 질문으로 '못한다'는 고정관념을 상기하기만 했는데도 실제 수학 능력이 급격하게 떨어진 거예요. 책은 말해요. 자신감이 능력보다 중요하다고. '출중한 능력을 갖추면 자신감은 저절로 생기겠지'라는, 대다수 여성들의 사고방식은 완전히 틀린 거라고. 자신감은 능력이 커지면 자동으로 키워지는 '종속변수'가 아니라, 능력과는 관계없는 '독립변수'라고. 그러니까 이 얘기였어요. "자신감을 키우기 위해 별도의 훈련을 하라. 그게 당신을 유능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 '별도의 훈련' 방법으로 여러 가지가 제시돼 있는데, 그중 두 가지만 소개하고 싶어요. '팩트체크'와 '우리 처방전'이에요. 팩트체크는 1초에도 수십 가지씩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에 근엄한 목소리로 '팩트입니까(윤종신 ver)'라고 묻는 거예요. 애석하게도 여성의 뇌는 남성에 비해 부정적인 사고 회로가 발달돼 있어요. 자꾸 안 좋은 상상을 하고, 최악의 결과를 떠올리고, 그러다가 자신감을 잃고, 마지막엔 능력까지 자진 상납하게 되는 이유예요. 그러니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 땐 '팩트'라는 가위로 그 중간을 싹둑 잘라버려야 해요. 예를 들어 '이번이 진짜 마지막 기회야. 이번엔 꼭 붙어야 해' 같은 생각이 들 땐 이렇게 묻는 거예요. "마지막 기회인 거 팩트야? 여기서 떨어지면 다신 아무 데도 지원 안 할 것도 아니잖아?"라고요.
'우리' 처방전은 이런 거예요. 내가 해내고자 하는 특정 임무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하는 것.
오하이오주립대 심리학 교수 제니퍼 크로커는 여성들이 '우리'라는 의식으로 무장할 경우 더 잘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 여성들은 아직 자신감이 불안정한 편인데, 그런 여성들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 보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대신 동료나 기업을 위해 일하기로 마음먹으면 놀랄 만큼 자신감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건 실제로 제가 효과를 봤어요. 최근 재취업에 성공했어요. 사실 처음엔 도전조차 망설였어요. 승산 없어 보여서요. 2년이나 언론계를 떠났던 저와 묵묵히 현장을 지킨 수백 명의 경쟁자들. 제가 면접관이라도 그들을 뽑을 것 같았어요.
'내가 너무 녹슨 건 아닐까. 정말 적응할 수 있을까. 후배보다 못하면 어쩌지. 결국 작가로는 실패해 언론계로 돌아온 거라고 남들이 비웃지는 않을까…'
면접장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이런 자기 의심과 피해의식에 시달렸고, 긴장감에 꼭 한겨울처럼 몸을 오들오들 떨었죠. 온도가 바뀐 건 '우리'를 떠올리고 난 후였어요. '여성을 위해서 써야 할 것이 아직 남았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없을까가 아니라, 내가 하려는 일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를 떠올리니 그제야 손 끝에 천천히 온기가 돌았어요.
그리하여 다시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3월 8일 여성의 날, 유일하게 '여성 기획'을 1면에 썼던 언론사예요. 브런치 독자분들께는 꼭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주절주절 긴 글을 썼네요. 브런치를 시작한 이래 가장 오래 이 곳을 들여다보지 못했는데요. 이제 어느 정도 적응했으니 다시 성실히 쓰려고 해요. 이곳 브런치와 지면, 영상을 사뿐사뿐 뛰어넘으면서, 주저앉은 여성들에게 끈질기게 손을 내밀어 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