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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우당 Jun 08. 2022

요양원 일지

   Episode-2  대면 면회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아드님 만나러 가는 거여요... 아들..... 네에  철수잖아요..

아들 이름을 동생 이름 부르듯 어르신 귀에 바짝 대고  크게 불렀더니 이내 이제 알았다는 듯이 금세 얼굴에 미소가 그득해지신다.


이경순 어르신은 나보다 먼저 요양원에 오신 분인데 늘 집을 그리워하신다. 나는 요양원에 온 지 만 3년이 되었다. 여기에 계신 어르신 대부분은 집을 그리워하시고 집에  가고 싶어 하신다. 당신이 떠나올 때의 집을 걱정하시고 돌아가고 싶어 하신다. 그 마음이 너무도 이해가 되어 짠해진다.

나의 손때가 묻은 세간살이와 내가 입던 옷가지 정리도 다 못하고 어찌어찌한 사연으로 갑작스레 몸을 다쳐 거동이 불편하거나 뇌출혈로 마비가 되었거나.... 계획 없이 부지불식간에 오셨으니 결국 돌아갈 곳이라고 언젠가는 꼭 돌아가리라  그러니 자식들도 늘 죄인이고 미안한 마음이리라.


어르신은 아들 얼굴을 보자마자 눈 그득 이슬을 머금고 곧 코를 닦고 울먹이는 소리를 내신다. 성격도 순하셔서 이때껏 한 번도 큰소리를 내신적이 없으시다. 젊어서는 쌀장사를 하셨다는데 거친 모습을 한 번도 보이 신적이 없으시다. 엄마를 대하는 아들의 성정을 보니 어르신의 품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아들은 핸드폰을 켜고 이런저런 것들을 보여주시며 말씀을 건네시고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하시며 엄마를 최대한 즐겁게 해 드리려고 노려하는 것이 영락없이 재롱부리는 어린아이와 같다. 그 아들도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데도 말이다. 

나랑 그 옆집에 살던 순이 엄마는 어떻게 지낸데? 죽었어... 그 이종사촌 범수 엄마는 건강하시다니? 진즉 죽었어... 그 이후에도 몇 분의 안부를 궁금해하셨지만 아들 대답은 엄마 빼고는 다 돌아가셨어.ㅜ 참으로 민망하고 몸 둘 바를 모를 대답이다. 어르신은 그적 저적 나도 가야 할 텐데.... 하신다. 


 요즘 경순 어르신은 종종 밥숟가락 드시는 것을 잊으시는지 식사를 앞에 놓고 멍하니 계시기도 한다. 한동안은 입이 터질 만큼 밥숟가락을 크게 하여 입에 넣으시고 또 바로 입에 넣으시고... 어르신 천천히 드시고 조금씩 드셔야 해요. 숟가락에 밥이 너무 많아요... 말씀을 드려도 안 들리시는지 그저 꾸역꾸역 드신다. 식사를 남기지 않으시고 다 드시니 식사 투정하시는 어르신들보다 걱정은 덜 되지만 어르신께서 음식 맛을 느끼시며 식사를 하시는 것인지 염려스러웠는데 요즘은 간혹 멍하니 계시니 우리의 걱정이 날로 커지고 있다. 


어르신들은 하루 한 달이 다르게 증상이 심해지기도 하시고 치매란 놈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종국에는 인간의 존엄성을 망가뜨린다. 자신의 주변 상황 모든 것을 의심하고  의심이 되니 모두가 자신을 공격하고 해코지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욕을 퍼붓어야 속이 시원하시고 본인의 그런 상황을 하소연해야 하는데 자식은 어쩌다 한 번씩 만날 수 있으니 게다가 자식마저 바른 소리를 해 드려도 이놈도 믿을놈이 못된다고 생각하시니 어르신 입장에서야 참으로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아침부터 욕을 진탕 먹은 케어 선생님들은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며 씁쓸한 하소연을 하신다. 우린 때로 어르신을 모시는 요양원이 아이들을 돌보는 유치원 보다도 몇십 배는 더 힘들다는 것을 안다. 간병에 효자 없고 자식들도 이 험난하고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통에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데.. 어찌 부모님을 돌볼 사이가 있을까? 김인자 어르신은 집에서도 수십 킬로 떨어진 다른 지역의 경찰서에서 어르신을 찾았다고 연락이 왔단다. 이러다 큰일 나지 싶어서 할 수 없이 시설에 모시기로 했다시며 오셨었다. 오르 신은 본인의 옛날 기억을 따라 기억 속의 집을 찾아보리라 소풍길을 나섰음에 틀림이 없다.

 가끔 나도 조용한 나만의 생각에 잠길 때는 첫아이를 잠시 키웠던 석유 집이 기억이 난다. 친정에서 빌린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4만 원을 내던 집이었는데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서 버스도 한두 시간에 한대 있을까 말까 했던 석유냄새가 나던 집이었다. 고단한 시절이었는데 고단한 줄도 모르고 살았었다. 그래도 그 집에서 첫째 딸을 낳고 산후조리를 하고 키웠더니 그 기억이 아득히 기쁨도 즐거움도 아닌 메어짐이 같이 올라온다. 처음 엄마가 되었고 쪼그만 꼬물이가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존재처럼 여겨졌었다. 본능적인 모성이 날 강하게 만들던 시절이었다. 지금 그 꼬물이가 스물아홉이 되었으니 어르신들의 말씀처럼 꿈같은 세월을 살아온 듯싶다.

한 분 한 분의 인생들을 우리가 다 알아드리지 못하는 것이 슬프고 켜켜이 삶의 아픔들이 쌓여 오늘 어딘가를 그리워할까 싶고 좋은 엄마 아빠가 되기 위해 열심히 사셨을 인생을 축복하고 위로해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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