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생긴 일이다. 계단을 올라가면 정자가 있는 소공원이 있는데 그곳에 올라가서 한 남자아이를 만났다. 엄마도 아이도 조용하기 짝이 없었는데 딸이 하도 꺄륵대고 노니 동화되었는지 남자아이도 깔깔대며 뛰어다니고 마치 처음 소리 지르며 놀아보기라도 한 듯 자기 소리에 신기해하며 잔뜩 흥분해서 놀았다. 아이들끼리 놀다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들어가자 했더니 딸이 끝까지 놀고 싶어했다. 남자아이는 아쉬워했지만 자디 엄마 손에 끌려 들어갔다. 결국 집으로 들어오면서 '더 놀고 싶었구나~'하고 마음을 읽어주는 것으로 때웠다. 그런데 아이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친구는 이번에 만나면 다음에 안 만날지도 모르잖아. 이번만 만나는걸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끝까지 많이 놀고 싶었어.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뭉클했다. 친구 만나서 노는걸 그리워해서 딱하다 이런 차원이 아니라, 삶과 인연을 대하는 태도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번 생에 단 하나의 인연으로 사람들을 만난다. 이번에 엄마로, 아빠로, 부부로, 자식으로, 친구로 만나진 이들은 이번에 만나면 다음에 또 만날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번만 만난건지도 모르니 만났을 때 한껏, 온 존재를 던져 함께 하며 즐기고 누리고 행복해하고 헤어지겠다는 그 마음이 너무도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이번 생에 내 딸을 딸로 만났다. 너무도 소중하지만 이번 생만인지도 모른다. 남편도 이번 생에만 이런 인연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귀하게 여겨도 죽은 후엔 모두 끝이거나 다신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만난다해도 기억이 없다면 이번 생의 의미 뿐인 것과 다름이 없다. 우리의 인식 밖이라서 그렇다. 그렇다면 같이 서로를 인식하며 살아있는 지금이 너무나 귀하고 감사하다. 우리는 그래서 최선을 다해 한껏 느끼고 사랑하며 같이 누려야 한다. 그게 즐거움일수도 괴로움일수도 있지만 온 존재를 던져 함께하고 나서 '우린 정말 끝까지 잘 놀았어!'하고 툭툭 털고 일어난다면 그게 득도지 뭔가. 아이의 그 말을 들으니 삶이 좀 더 선명하게 그리고 귀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너는 나에게 정말 스승이다. 이걸 나 혼자 느끼는게 아까울 정도다. 나도 너랑 잘 놀다가 가련다. 나도 남편이랑 잘 놀다가 가련다. 나도 내 인연들과 잘 놀다가 가련다. 내 자신, 내 삶과 잘 어울려 놀고 누리다가 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