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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마 Nov 22. 2016

아이의 입장에서 기질 이해하기

슈타이너의 기질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예비 부모라면 누구나 '내 아이는 착하고 말 잘 듣는 얌전한 아이면 좋겠어'라는 기대를 한번쯤은 할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도 '여자아이니까 좀 얌전하고 순하지 않을까?','엄마가 나같은 딸은 여럿도 키우겠다고 할만큼 순했다는데 날 닮아서 순하면 좋겠다'같은 망상을 품으며 부른 배에 대고 사심 가득한 소원을 빌기도 했다. 그러나, 선배 엄마인 친구의 말에 의하면, 가장 기본적인 것인 '밥 잘 먹는 것/ 잘 자는 것' 둘 중 하나만이라도 해주면 전생에 복을 지은 것이고, 대개는 어느 하나 혹은 둘 다 난관을 겪는다고 한다. 떼쓰고 울고 보채고 고집 피우고 등등은 보너스란다. 그래서 일찌감치 마음을 비우고, 보다 근본적인 것부터 생각해보기로 했다.
 
 모든 아이는 세상에 태어난 후 새로운 자극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치며 혼란을 겪는다. 늘 따스하고 어둡던 곳에서 애써 튀어나왔더니 냄새도 빛도 소리도 촉감도 모두 생소하고 겁난다. 다행히 익숙한 엄마 냄새가 곁에 있고 자극에 적응하며 세상을 배워나가긴 하지만, 자그마한 아기에겐 모든 것이 혼란 그 자체다. 모 육아책에는 아이의 그같은 발달상의 변화를 '어느날 눈 떠보니 다음 날 화성에서 깨어나는 경험'이라고까지 묘사했다. 그러니 그렇게 울 수 밖에. 전문가들은 아이의 울음은 말 그대로 '표현'이니 너무 당황하지 말고 차분히 아이의 상태를 살피라고 조언한다. 그래,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여본다.

 어른도 새로운 환경에 놓여 도전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저마다의 성격에 따라 모두 다른 반응을 보인다. 다소 위험한 것 같아도 거리낌없이 행동하고 도전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냥 해봐도 될법한 일도 돌다리를 두들기며 건너기라도 하듯 조심스레 접근하는 사람이 있다. 똑같은 영화를 봐도 남이 재밌다고 하면 같이 재밌다고 여기는 이가 있고, 남들이 아무리 재미있다 해도 자기 생각에 영 아니면 무시하는 사람도 있다. 감상적인 사람도, 논리적인 사람도 있다. 아이는 어른보다 더 큰도전 상황에 매번 놓여 있는 생명체이다. 학습된 것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답게'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때그때 배운 것을 자기화하며 성장해나가는 생동감 넘치는 존재인 그들은, 각자의 '기질'에 의해 세상을 받아들이고, 느끼고, 소화하고,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 아이가 적은 아니지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다. 아이의 기질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얘가 어떻게 자극을 받아들여 소화했는지, 그래서 어떤 식으로 느낀걸 표현하는지 (그것도 어른처럼 머리를 돌돌 굴리는게 아니라 날감정 그대로의 것을 솔직히 표출하니 알기가 더 쉽지 않은가!) 알고 적절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좋다!! 그렇게 찾아본 아이의 기질은 다음과 같았다.

미국의 아동학자에 의하면, 아이는 까다로운 아이, 순한 아이, 반응이 느린 아이, 그리고 세 특성이 혼재하는 아이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각 특성에 맞는 설명이 있다. 예를 들어 유별나지 않고 고집도 잘 부리지 않으며, 혼자서도 잘 지내는 아이는 순한 아이이고, 호오가 명확하고 뜻대로 뭔가 되지 않으면 화를 잘 내는 고집 센 아이는 까다로운 아이다. 까다로운 아이에게는 일관성 있는 규칙을 알려주고, 변화를 사전에 알려 동의를 구하고, 실컷 놀게 하고, '마음에 드니~?'라는 등의 질문을 많이 하라고 한다.

 내가 감히 어찌 학자의 의견에 토를 달겠느냐만, 나에게 저 묘사는 아이의 기질이라기 보단 '엄마가 다루기에'라는 말이 앞에 생략된, 양육자 입장에서 본 아이의 특징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일관성 있는 규칙이나 아이의 감정과 의사를 존중하는 마음을 바탕에 둔 동의 구하기나 질문은 모든 아이에게 필요한 것 같다. 저게 정말 아이의 입장에서 본 아이의 기질일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어른에게 적용해도 까다로운 사람, 순한 사람, 반응이 느린 사람, 셋이  혼재된 사람으로 뭔가가 설명되는 것 같지도 않고,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떤 자극을 주었을 때 상대가 어떻게 대응하는가'라는 상대성에 의해 묘사할 수 밖에 없는 특징들이다. 한마디로, 엄마가 참을성이 없으면 내 아이는 누군가에겐 무난하지만 나에겐 까다로운 아이가 될 수도 있고, 엄마가 둔한 편이면 유난스러운 아이도 그냥 순한 아이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엄마가 다루기에'라는 전제가 붙는다면, 그건 아이의 기질을 온전히 설명한다고 인정하기가 어렵다. 엄마의 기질에 의해서도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으로 의구심을 품다가, 발도르프 교육을 창시한 슈타이너(슈타이너는 철학자이자 신비가, 사상가, 교육자이다)의 책을 접했고, 그가 나눈 아이의 기질에 더욱 공감이 가서 소개해본다.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의 기질론에서 시작된 다혈질,점액질,담즙질,우울질이 그것이고 이는 각각 공기,물, 불, 땅의 속성에 해당한다. 동양의 풍,수,화,토이니 음양오행과도 통하는 것이 있다. 슈타이너는 그런 아이의 기질을 태어날 때부터 구별할 수 있다고 했다.

담즙질 유형 (불의 속성)
- 열정적인 기질을 가진 아이, 에너지가 넘치고 무언가를 하고 싶어한다. 의지력과 넘치는 활동력을 가지고, 독수리와 폭풍, 곰처럼 주도권을 행사하고, 때론 거만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경향이 있다. 선구자적인 사람이 이런 유형으로, 단단하고 기운차며, 자기중심적인 특질이 있다.

"엄마, 나는 내가 직접 뭔가를 해보고 알아가는게 중요해요. '내'가 중심이 되어서 뭔가를 해낸다는 것이 날 살아있다고 느끼게 만들어요. 지금 내가 울고 있다면, 난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에 화가 난 것일거에요. 나에게 필요한 것은 주도적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것과, 그 과정에서 내가 너무 나만 아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에요. 이 세상에 나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점액질 유형 (물의 속성)
- 꿈꾸는 듯 공상적이고, 앉아 있기를 좋아하는 유형의 아이, 몸의 안락함을 추구하며 변화를 꺼린다. 다른 사람과 일상적인 삶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아이다. 어떤 한가지에 깊이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이 기질은 물과 관련이 있다. 물결은 지치지 않고 계속 흘러가는 리드미컬한 성질을 갖고 있다.  

"엄마, 나는 평화롭고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고 유지하는게 중요해요. 안전하지 않게 여겨지는 급작스러운 변화는 날 두렵게 해요. 내가 울고 있다면, 나는 두려워하고 있을거에요. 나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에 지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세상을 탐험하는 일일거에요. 하지만 엄마가 안전하게 날 지켜준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그리고 내가 해보고 안전하다고 느끼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을거에요."


다혈질 유형 (공기 속성)
- 항상 밝고 행복한 아이, 명랑하고 눈물을 보이다가도 금방 웃는다. 순간적으로 어떤 하나에 열정을 쏟아 붓기도 하나 끝마무리를 잘 하지 못하는 편이다. 아동기에 이 유형의 아이에게 나타날 수 있는 어려움은 시작한 일을 끝까지 마치는 것이다. 쉽게 새로운 일에 주의가 쏠리며, 이 기질은 공기의 가볍고 항상 변하는 성질과 관계가 있다.

"엄마, 나는 호기심이 많고 다양한 것에 관심이 가요. 세상의 새로운 것들은 나에겐 다 재미있는 일들이에요. 흥미를 잃은 것을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은 나에겐 고역이에요. 내가 울고 있다면, 난 지금 뭔가가 되게 하기 싫은걸거에요. 새로운 것을 보여주세요. 내가 배워야할 것은, 당장 흥미로운 것이 아니더라도 그 의미를 알고 끝까지 참아내고 해냈을 때의 성취감이에요. 엄마는 내가 주의력이 산만하다고 걱정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난 한번에 많은 것에 관심을 가질만큼 왕성한 호기심을 가졌을 뿐이에요."
우울질 유형 (땅의 속성)
- 내성적인 아이, 외부 세계보다는 자신의 감정적이고 내적인 세계에 관심이 더 많다. 연민이 많고 자연을 잘 돌본다. 지나치게 민감하고 실제 일어난 일보다 자기 자신의 반응에 더 많이 사로잡히는 감수성 예민한 기질이다. 자기 생일파티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는 전형적으로 이런 유형이다. 생각, 기억, 감정적 반응을 깊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땅은 그 깊은 속에 반짝이는 보석(광물)을 지니고 있다. 사고와 감정이 관련된 자신의 내적 세계에서는 나름대로 풍요롭다.

"엄마, 나는 내 생각과 감정에 집중하고 있을 때 가장 안정감을 느껴요. 세상의 것들은 신기하지만 그것들은 내가 소화해서 내 것으로 만들기 전에는 별로 관심없는 것들이에요. 내가 울고 있다면, 내가 관심을 갖는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주세요. 그것에 대해 충분히 스스로 즐기고 익혔다면, 난 또 다음 것을 자발적으로 찾아서 집중하고 즐길거에요. 내가 배워야할 것은 이런 내 상태를 엄마에게 잘 알리는 일이에요. 말을 안해서 잘 모르겠다고 하기 전에, 잘 표현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엄마가 한 번만 더 물어봐주면 좋겠어요."


 이런 기질을 잘 이해하고 인정하면, 우리는 아이가 실제로 필요로 하는 가르침과 훈육을 시킬 방법을 적절히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담즙질의 사람은 에너지가 자기에게 쏠려 있고 자기 표현욕구가 대놓고 강한 타입인데(아마도 이런 아이는 어떤 면에서 까다로운 아이로 여겨질 것이다), 이런 아이는 자기중심적인 성격으로 성장하기 쉽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아이에게는 '세상의 중심이 너인 것이 아니고 배려해야 하는 타인이 있음'을 이해시키는 방법이 필요한데, 이 과정에서 아이가 느낄 분노나 실망을 다른 것(분출할 다른 에너지-운동이나 놀이 등)으로 바꾸도록 유도해야 아이가 균형감있게 자란다. 마찬가지로, 내적 세계를 풍요롭게 가꿀 줄 아는 우울질 유형의 아이는 특유의 예민한 감정을 보다 잘 표현하도록 돕는 것을 통해 아이가 자기만의 세계에 빠지지 않도록 균형을 찾아줄 수 있다.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순한 아이로 오인하고 그냥 놔둔다면, 아이와의 소통이 어려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비단 아이 뿐 아니라 부모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나의 경우는 우울질 유형이다. 내적 세계가 풍부하고, 활동성이 많지 않다. 이런 나에겐 담즙질 유형의 활달하고 에너지 넘치는 아이는 그야말로 외계인처럼 느껴질 것이다. '힘들고 까다로운 아이'가 되는게다. 그런데 내 성향대로 아이를 보고 단점을 '고쳐야 할 것'으로 여긴다면 '제발 좀 가만히 있고, 생각 좀 하고 행동해!!'라는 말이 먼저 나올 것이다. 이 아이는 그저 자기가 직접 뭔가를 해본 후 몸과 경험으로 배우고 깨닫는 주도적 행동파일 뿐인데 말이다. 그럼 엄마인 내가 아이다운 세상 배워나가기에 훼방을 놓는 셈이다. 하지만 같은 유형이라면 둘이 신나게 저질러보고 수습하면서 세상을 즐겁게 탐색해나갈 수도 있다. 단, 균형을 잘 잡고 좀 더 배려있는 행동을 한다면 말이다.

 아이의 기질은 아이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보는 것이지, 아이를 '어떻게 내 입맛에 맞게 가르치고 이끌지'를 위해 알아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까다롭다','순하다' 등의 상대적이고 양육자 시선에서 재단된 단어를 사용한 설명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아이의 특징을 묘사하고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은 중립적인 시선을 통한 설명에 보다 힘을 실어주면 어떨까 한다.

 아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봐야겠다고 다짐해본다. 그리고 새삼, 엄마인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정말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나로 인해 정의될만큼 내 영향을 많이 받는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육아는 방법론이 아니라 철학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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