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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원영 Aug 10. 2017

나무 젓가락을 쓰다

아버지의 젓가락

 쇠 젓가락은 무거워서 들지를 못해.



 식구끼리 점심을 먹으러 간 냉면집, 아버지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의 가방에서 고운 니트 커버를 씌운 대나무 젓가락이 나온다. 아버지의 <외출용 젓가락>이다. 어머니도 나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아버지의 젓가락에는 이미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한다. 아버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젓가락을 잡으신다.


 아버지는 40대에 나를 늦둥이로 얻으셨다. 올해 82세이신데, 딸인 나는 이제 30대 후반이다. 난 또래에 비해 이르게, ‘늙은 부모님과 사는 법'을 배워야 했다. 친구들의 부모님이 한창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던 것과 달리, 아버지는 내가 10대일 적에 은퇴하셨다. 스물둘 무렵엔,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다행히 증상이 경미한 편이라, 보름간의 입원과 재활치료로 몇 달 내로 정상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당시 몸을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는 경험을 한 아버지는 덜컥 겁이 나셨던 모양이다. 그 후로 아버지는 틈만 나면 나에게, ‘나중에 내가 떠나면’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행동강령’을 전수하기 시작하셨다. 나 역시 재활치료실에서, 아버지가 유아용 셈하기 장난감의 알구슬 하나를 힘겹게 반대편으로 넘기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눈물을 삼켰던 경험이 있는지라, 그 행동강령 하나하나를 무겁고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아버지가 없으면 엄마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못가, 내가 힘들어졌다.  


좋은 말도 여러 번 들으면 질리는 법이다. 하물며 ‘당장 내일이라도 내가 어찌될지 모르니 넌 늘 긴장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말은 오죽하겠는가. 아버지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했지만, 부모의 죽음을 가정하고 ‘그날’의 시뮬레이션을 해보며 아버지 사후의 대책을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도 하듯 떠올려보는 것은 정신적 고문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창 꽃필 스물 초반의 나이에, 왜 나는 이런 우중충한 말을 들으며 살아야 하나 싶어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아버지의 레파토리는 ‘나는 이제 예전같지 않고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였다. 나중에는 당신 사후의 행동강령 자체보다는, ‘아픈 아버지’를 가진 딸의 입장을 재확인하고 충분히 여기에 걸맞는 태도로 부모를 대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그 과정에는 언제나 잡음이 있어, 아버지는 열에 아홉은 나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며 화를 내셨다. 자식이 되어 늙은 부모를 그만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나는 나대로 한다고 했지만, 늘 부모님에겐 모자라기만 했다. 내가 그렇게 몹쓸 자식인가 싶어 속상하기도 했고, 스물 초반인 나에게 이런 요구가 합당키나 한가 싶어 화도 났다. 또래 부모님들 중엔 자신들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러워하며 자식을 닦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노인이 되면 아이가 되고,
자기연민이 많아지며 쉽게 서러워한다는 것을
책을 통해, 그리고 집에서의 경험을 통해
알고는 있었다.


나이든 부모와 살았기 때문에 노인심리에 대한 책을 열심히 찾아 읽었고, 서점에서 같은 종류의 책을 읽는 사람들이 죄다 중년 이상의 사람들인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었다. 어쨌거나,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이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아버지는 여전히 당신의 기대치에 내가 어긋나면 서운해하며 화를 내셨고, 그런 아버지가 나를 부르기라도 하면, 내 표정은 나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나는 어떻게 해도, 아버지가 바라는 만큼 아버지의 불안에 공감할 수 없었다.
 늘 평행선일 것만 같았던 부모님과 나의 간극은, 세월이 흘러 나의 내면이 조금씩 성장해나가면서 차츰 좁혀지기 시작했다. 결혼을 하고 좀 더 철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20대 때와는 달리, 아버지를 내 '아빠‘이기 이전에, 삶의 마지막을 향해 걷고 있는 한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아버지의 ’설교‘가 다르게 다가오며 눈과 마음이 트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젊은 시절이 있었고, 한 가정을, 직장에서는 한 부서를 이끌던 때가 있었다. 어머니와 열렬한 연애도 하셨을 거고, 자그마한 딸이 걸음마를 걷는 것을 보며 열심히 살아야겠다 다짐도 하셨으리라. 그때의 아버지는, 당신의 노쇠한 모습을 상상조차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말을 안 듣는 자신의 몸을 싫어도 확인할 수밖에 없고, 매일 먹는 약은 늘어만 가고,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나서 방문해야 하는 병원도 많아지기만 한다. 인생의 종착역에 언제 다다를지는 모르지만, 멀지 않았다는 것을 매일의 몸 상태를 통해 확인한다. 그러니 얼마나 두렵고, 또 외롭겠는가. 뇌졸중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때엔, 달리 의지할 곳 없는 어린 딸이 얼마나 눈에 밟혔겠는가. 지금껏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사후 행동강령’은 철없는 어린 딸을 위한 걱정이었다. 나이 든 부모를 두어 내가 괴로웠던 것이 아니라, 너무 어린 자식이어서 노쇠한 부모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내가 결혼을 한 후에는, 딸을 믿고 맡길 곳-여성이 의존적인 존재도 아닌데 믿고 맡긴다는게 영 마뜩찮지만, 저 시대 양반에겐 그게 삶의 진실인 법이다-이 생겨서인지 이전과 같은 설교는 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여전히, 삶의 마무리 길을 걷는 인간의 두려움과 고독이 빚어낸 불안이 남아서, 눈만 마주치면 ‘내가 예전이랑 달라’, ‘입맛이 없어’, ‘걷지를 못해’라고 하신다. 사실, 실제보다 다소 과장된 부분이 없잖아 있다. 가출한 입맛은 고깃집 외식할 때엔 신기하게도 다시 돌아오고,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못 따라갈 만큼’ 빠르게 걷기도 하신다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입버릇처럼 나오는 그 넋두리가, 한 인간으로서의 두려움이 담긴 애잔한 엄살인 것을 안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작아 보일수록, 나는 아버지를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몇 년 전, 어머니가 심장질환으로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거쳐 열흘간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다. 그때의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약한 소리 한 번 하지 않으시고, 매일을 병원에 출퇴근하다시피 하셨다. 나도 퇴근 후 매일 병원에 갔다가,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순대국을 먹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문득 아버지의 어깨가 작고 여리게 느껴져 손을 잡았다가 왈칵 눈물을 쏟을 뻔 했다. 힘내자고 잡은 손이 너무 앙상하고 눅눅해서, 아버지의 쇠약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다음날 어머니를 위해 챙겨올 물품들을 읊조리며, 깜빡깜빡 자꾸 잊어버린다고 비통해하고 계셨다. 난 그런 아버지에게 힘이 되고픈 마음에, 생각나는 대로 말을 꺼냈다.


아빠, 노인이 되면 왜 자꾸
깜빡깜빡 하는지 알아?
몰라. 왜인데?
사람이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남은 시간동안 진짜로 중요하고 소중한 것만
기억하라고, 쓸데없는 걸 잊게끔
신이 그렇게 만든거래.
그니까 아부진 마누라랑 딸래미만
안 잊어버리면 돼.
그래...


 말하고 나니,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콧날이 시큰해졌다. 아버지는 내 손을 꽉 잡으셨다. 그래도 손아귀 힘이 영 세지가 않아, 내가 손에 힘을 주었다.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는 몸과 느려지는 정신을 붙들고, 매일을 작지만 묵직한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노인이 거기 있었다. 그게 나의 아버지이고, 나의 어머니였다.


 요즘은 ‘가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다보니 더욱 그렇다. 아이는 자신의 움직임부터 신기해하며 주변 환경에 적응하느라 애를 쓴다. 숟가락을 잡고 음식을 입에 가져다 넣는 것도 적응의 과정이다. 그 적응을 돕기 위해 부모는 아이를 돌보며, 격려하고 지지한다. 아이와 세대의 반대편에 있는, 늙은 부모도 나름의 적응을 하느라 애를 쓴다. 이전에는 필요 없던 지팡이가 필수품이 되고, 걷다가 잠시 쉬며 허리를 두드리는 것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삶에 시한부 선고라도 하듯 늘어가는 병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척, ‘자식들 걱정하지 않게’ 몰래 앓고 마는 것도 연습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늙은 부모의 이런 적응을 아이의 그것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늙은 부모도, 아이 못지 않게 큰 변화를 겪는다. 인생의 마지막을 예고하는 변화이기에, 낯설고 두렵다. 그리고 가족이라면, 구성원이 삶의 중요한 단계에 있을 때 지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린 세대가 세상을 잘 받아들이도록 지지하는 것도 가족이고, 늙은 세대가 세상을 잘 마무리하도록 지지하는 것도 가족일 것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못 먹겠다고, 못 걷겠다고 하신다. 그 말이 듣기에 불편하고, 안 좋은 상상을 하게 만들어 외면하고 싶은 맘이 굴뚝같지만, 이제는 말 뒤에 숨은 뜻을 조금은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나 지금 이만큼 몸이 말을 안 들어서 불안하다고, 외롭고 무서우니 날 좀 봐달라고 하는 외침이다. 아버지는 지난 15년 간 당신만의 서툰 방식으로 어린 딸에게 손을 내밀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내가 10년이라도, 아니 5년이라도 빨리 이런 것을 알았더라면, 아버지의 남은 시간을 좀 더 덜 외롭고 따스하게 채워드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만간 부모님과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갈 예정이다. 아버지는 분명 쇠젓가락의 무게와 당신의 손아귀 힘의 관계를 논하며, 예의 그 <외출용 젓가락>을 꺼내실게다. 그 젓가락으로, 입맛이 없다는 추임새와 함께 샐러드 두 접시와 밥 한 공기, 고기 1인분을 너끈히 드시기를 기대한다. 서툰 손놀림으로 밥수저를 입에 넣는 내 아이를 따스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것처럼, 역시 따스한 시선으로 아버지의 둔한 젓가락질을, 굼뜬 걸음걸음을 지켜볼 것이다. 잘 드시고도, 고집스럽게 ‘내가 요새 잘 못 먹어’라고 덧붙이시면, 남편과 눈을 마주치고 슬며시 웃을 것이다.   


 그간 어리고 철 모르던 딸이라 헤아리지 못했던 노쇠한 아버지의 속내를, 남은 시간동안에라도 열심히 귀기울여 듣고, 보듬고 싶다. 언제가 되건, 아버지에게 나는 여전히 남기고 가기 걱정되는 어린 딸일 것이다. 그래도 이 지구별에서, 한 생을 함께 하며, 아버지와 딸로서 괜찮게 살았노라고, 네 덕에 내 삶의 한 켠이 조금이라도 따스했노라고 미소 지으며 회고하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지금 알고 있는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이란 제목의 시가 있다. 나에게 그 시에 한 단락을 추가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다음과 같이 적고 싶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사람은 아이로 태어나 아이로 돌아감을 알고
늙은 부모의 마음 속 아이를 꽉 안아 주었으리라
그들이 어린 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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