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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원영 Aug 03. 2018

밥맛과 살맛

기뻐야 잘 먹는다

안 먹어!

두돌 지난 아이가 가끔 밥을 안 먹겠다며 고개를 팩 돌리고 기싸움을 벌이려 한다. 뭐든 잘 먹는 편이었던 녀석이 자기 고집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밥’으로 힘겨루기 하는 법을 알게 된 모양이다. 힘겨루기를 해보기도 하고, 얼르기도 하고, 그냥 밥을 치우기도 하면서 대응책을 찾으려 했지만, 가장 근본적인 답은 ‘뭘 해야하나’가 아니라, ‘왜 안 먹으려할까?’란 질문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우선 아이가 밥을 거부할 때의 상태가 어떤지 살펴보았다. 대부분은 내가 어떤 이유로든 아이에게 충분히 몰입해서 적절한 안정감을 주지 못할 때, 아이는 밥을 거부하거나, 먹더라도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도록’ 만들었다. 내 태도를 바꾸거나 아이와 충분히 교감을 한 상태면, 아이는 밥을 잘 먹었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무엇을 하면 엄마가 관심을 가져주는지’ 아는 것만 같았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문제’처럼 보인다 해도 그건 어른의 입장에서 본 것일 뿐이고, 아이에겐 ‘엄마의 관심이 집중적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으로, 아이가 식사를 거부할 때 내 마음 상태를 들여다보면 열이면 열, 어딘가 산만하거나 불안정해서 ‘아이와 지금 여기에서 충분히 함께하고 있지 않고 아이를 알아주지 않는 상태’였다.


양상은 조금 다르지만, 노쇠한 아빠도 식사를 거의 안 하시고 ‘못 먹겠다’ 하신다. 특별한 질병이 없이도 아빠는 늘 밥맛이 없다고 하셨다. 엄마 생전에도 매한가지였다. 엄마는 아빠에게 이런저런 먹거리를 갖다 주었지만 늘 ‘못 먹겠다’고 하셨고, 엄마는 결국 포기하고 아빠가 먹고 싶다고 하는 인스턴트 죽을 제공하는 선에서 기싸움을 멈추었다. 그런데 외출을 하면 밥 두 공기에 양념갈비 1인분을 거뜬히 드셨기에, 우린 늘 뒤에서 수군대곤 했다. 당신이 ‘못 먹는다’고 해서 식구들의 관심이 쏠려야 만족하는 고약한 성미라며, 우린 그저 비난하기 바빴다.

지금의 아빠는 ‘정말로’ 못 드신다. 아기를 키우면서 알게 된, ‘식사는 소통이고 관심의 표현’이란 공식을 아빠에게 적용하니, 많은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다. 밥맛은 곧 살맛이었다. 살맛이 날 때 아이건 어른이건 밥맛이 나고 잘 먹는다. 아이나 어른이나 표현 양상이 다를 뿐,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갈구한다. 바로 누군가의 애정과 관심이다. 자신을 향한 애정이나 관심이 충분치 않다고 느끼면, 살맛이 나지 않아 밥맛이 떨어지고, 식사 등 기본적인 것을 거부함으로써 상대의 관심을 끌어내려고 한다. 삶의 양쪽 끝에 서있는 아기와 노인이, 거울상처럼 같은 욕구를 같은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을 보며, 나는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전율같은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의 민낯인지도 모르겠다고, 보통의 성인이 아무리 세련되게 자신을 포장하고 있더라도, 결국 바라는 것은 애정이고 관심이지 별다른 것이 있는게 아닐거란 생각이 들어 나 자신도 겸손해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살맛이 나지 않으니 밥맛도 없다. 밥맛이 없어서 먹지 못하면 식구들이 걱정하거나 이런저런 먹을 것을 갖다 주게 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욕구를 표현하고 건전하게 소통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자신을 깎아가면서까지 관심을 받고자 한다. 본인도 그게 질병인줄만 알지, 관심 받고 싶은 욕구가 드러난 것이란걸 깨닫지 못한다. 아이는 충분히 자기 의사를 표현하거나, 욕구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기에 ‘말을 안듣거나 부모가 가장 관심을 기울일만한 방법’을 써서 은연중에 관심을 받으려 하고, 노인 역시 욕구를 알아차리고 표현하는 방법을 모를 때, 노화와 질병을 앞세워 관심을 받으려 한다. 아이는 아직 배우지 못해 정말로 몰라서 그렇게 한다. 하지만 노인의 그것은 한 생을 살면서 타인과 제대로 교류해본 적이 없어 그 방법을 모르기에 도드라지는 잘못된, 그리고 안쓰러운 소통의 예다.

식구들을 힘들게 하는 노인은 젊어서도 주변을 힘들게 했다. 솔직히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좋은 말로 이야기하지 않고 상대를 불편하게 하면서 원하는 바를 ‘내놓도록’ 유도했다. 우리네 어르신들은 전쟁을 겪었기에 소통이니 애정이니가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문제인 시대를 살아냈다. 그러니 건강한 자기 표현이나 자기성찰이 익숙치 않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 뒤틀림은 더욱 크다. 거기에 노화로 인한 몸의 불편이 겹치니 신경은 더욱 날카로워진다. 약간의 자극에도 금방 ‘살맛이 안나는’ 상황에 빠져 신경이 곤두서고 밥맛도 없어지고 몸도 더 아파온다. 본능적으로 ‘내가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아픈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하다.

못 먹고, 아프고, 괴롭다는 하소연은, 실제의 괴로움보다 과장되어 있다. 아픈 상태가 소통의 도구이니 더 매달린다  건강하고 친밀한 관계를 가져왔다면 다른 방법을 쓸텐데, 그런 관계를 맺는 법을 몰라 잘못되고 괴로운 방법인 것을 알아도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간다. 그렇기에 슬프고 안타깝다.


건강하게 내 욕구를 표현하고, 사람 사이에서 부대끼며 웃고 울고, 함께 하는 삶을 살 때 사람은 살맛이 나고 밥맛이 난다. 밥도 함께 먹을 때 더 맛있지 혼자 꾸역꾸역 안 먹으면 죽으니 뭐라도 채워넣는 식으로 먹으면 맛을 잘 모른다. 밥맛은 살맛을 반영하고, 소통을, 외로움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하는 맛을 담아낸다. 아이도 노인도 사는게 즐겁고 밥 주는 누군가 날 알아주는 것 같아야 밥맛이 난다. 나이불문하고 비슷하겠지만, 자기중심성이 도드라져 일상에 배어져 나오고, 체면 차리느라 세련되게 스스로를 포장하지 못하는 시기의 인간, 즉 삶의 시작과 끄트머리에 있는 아이와 노인이 유독 더 그런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삶의 행복과 그 의미를 묻는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 먹는 것이 등장하는 것도, 단순히 몸을 돌보라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랑이 있어야 잘 먹을 수 있다. 나를 돌보는 건강한 음식을 먹는 행위도, 나를 사랑해야 가능한 일이다. 타인의 관심을 물심양면으로 더 필요로 하는 시기-유년기와 노년기-엔 더 민감할 수 밖에 없다. 밥맛 없어하거나 밥을 거부하는 이의 내면에는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이 있다. 쉽지 않지만, 밥 뿐 아니라 사랑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부터 살맛 나는 밥을 먹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래야 누군가에게 줄 수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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