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선배와 후배
이 글은 한국국제협력단 파견 해외봉사단원으로 활동했던 33년 전, 죽음을 이겨내고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며 활동 당시의 임지방문 등 15일 간 스리랑카 여정을 담는 글이다.
뎅기열로 인해 한국으로 후송된 이후, 상태가 바로 호전되진 않았지만 현지 활동에 대한 미련과 책무를 다하지 못한 자책감으로 서둘러 근육통 치료를 받으며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배낭 하나만 챙겨 급히 돌아온 탓에 언니 댁에 머물며 치료를 받던 그 시절, 연로하신 어머니께서 병든 막내의 모습을 보시고 놀라실까 봐 본가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임지로 돌아가겠다는 꿈을 놓지 않았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무어든 챙겨 먹으며 애썼다. 그러나 몸은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고 복귀 준비를 시작했지만, 치료 중간중간 외출할 때마다 다리가 풀려 횡단보도에서 넘어지고, 버스 정류장에서 쓰러지기를 서너 번 반복했다. 그때마다 마음은 늘 함반토타를 향해 있었다.
1993년 12월 초 서울에 도착해 1994년 새해를 맞았다. 현지 병원에서 시작된 치료는 한국의 을지병원, 그리고 마포에서 먼 고대안암병원까지 이어졌다. 근육 수축·이완 훈련을 마치고 스리랑카로 돌아간 시점은 4월 중순, 가장 뜨거운 계절이었다. 콜롬보 호스텔에 머물며 입원 당시 도움을 주셨던 분들을 만났지만, 돌아오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지치기 일쑤였다. 당시 남자 선배가 코디네이터로 활동하던 시기라,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동기들과 수도 인근에서 근무하던 후배들이 주말마다 살펴주었다. 그러나 더 이상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코디네이터의 보고에 따라 ‘중도 포기’가 결정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나를 짓눌렀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건강만큼은 내 의지로 해결할 수 없다는 좌절감 속에서 결국 중도 포기를 선택했다. 콜롬보에서 조금 회복한 뒤 임지로 돌아가겠다는 호언장담은 ‘본국 복귀 의견’을 품은 채 임지로 향하는 길이 되어버렸다.
현지 병원에서 콜롬보로 후송할 것을 권해 급히 승합차를 렌트해 콜롬보로 향하던 날을 기억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다시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떠나오면 또 얼마나 미안함이 커질지, 먼저 사무실로 전화해 사정을 전하고 바로 임지로 향했다. 도착하니 동료들과 어찌 알았는지 그간 오가며 정들었던 사람들이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긴시간 이동하는 차 안에서 충분히 마음을 다스렸다고 여겼는데도, 내리자마자 반가운 얼굴들을 보자마자 눈물이 터져버렸다. 죽지 않고 살아왔으니 다행이라고 여겼겠지만, 또 상태가 나아지지 않아 한국으로 가야한다니 얼마나 딱하다 여겼을지, 한사람씩 작별 인사를 나누고, 하숙집에 남겨둔 짐 중 많은 것을 현지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고 조촐하게 짐을 꾸려 다시 콜롬보로 향했었다. 그 중 몇몇은 내가 콜롬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어느날 그 먼길을 달려와 찾아와 면회를 청했더니, 한국으로 후송되었노라는 소식을 듣고 아쉬워했다 하고, 다시 간다 돌아가야 한다하니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로 작별을 고해 주었다. 다시 콜롬보에 도착해 동기들과 4기 후배, 잔류 선배들과 송별회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 이후로도 뎅기열병은 너무나 많은 흔적을 남겨 주었다
콜롭보에서 마침 캔디 일정을 마련하려다 우연하게 일정이 겹쳐 만나게 된 후배님들, 그때 임기를 마치지 못한 선배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파견되었던 5기 후배가 후배들의 멘토가 되어 교육차 콜롬보로 방문해 만났다. 당시 몰랐던 사정과 이후 160기, 166기 후배들의 소식까지 들었다. 지난 추억과 봉사단 파견 제도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게는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단 하나도 없었다.
5기 후배님 사정은 듣자니 참 눈물났다. 선배가 중도에 한국으로 돌아가자, 마침 같은 분야의 후배는 이미 다른 임지로 배정이 될 것으로 예정되었을 터인데, 갑작스레 떠난 빈자리 업무 수행을 위해 배치되었으니 고생이 불보듯 뻔했다. 선배는 이미 현지어로 소통에 문제가 없고 한국 연수까지 다녀왔고, 나름 콜롬보를 오가며 또 지역에서는 업무나 관계를 원만히 하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뒤를 이어야 했으니, 많은 점에도 억울하기도 하고 갑갑하기도 했을 것이다. 선배는 WDF를 꿰뚫고 있었지만, 신입 후임은 현지어도 낯설고 업무도 익히기 전인데, 마침 WDF는 한국 연수를 다녀온 효과를 백분 발휘해, 스리랑카 전국 각지에서 한국 다녀온 소식과 관련해 개발?된 프로그램까지 정신없이 진행을 하던 상황이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당시 전직원은 날마다 비상이라 신입을 챙겨줄 사람도 없었고, 기관에서는 당연히 같은 수준의 일을 하거나 또 나아가 '선배처럼 당신도 한국 연수를 갈 수 있게 해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반복적으로 받아야 했던가 보다. 결국 여러 벽에 부딪히던 후배는 파견 4~5개월 만에 현지 적응의 어려움을 호소했고, 상황을 판단한 코디네이터와 본부의 협의로 전혀 다른 임지로 재배치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재배치된 임지에서 성공적을 수행을 마쳤음을 32년 만에야 제대로 들어 알게 되었다. 후배는 누구보다 현지어가 능하고, 현지에서 결혼도 한 경우라, 이제는 지역의 유지로 든든하게 자리잡으로 후배들의 멘토로 멋지게 활동하고 있었다.
후배들과의 만남을 마치고, 4~5시간 거리의 지역으로 돌아가야 하는 후배가 아쉬워 잠시라도 더 이야기하자며 유럽인들이 좋아하는 랑카 브랜드 ‘BAREFOOT’에 들렀다. 다양한 컬러와 직조 원단으로 시작해 지금은 레스토랑까지 확장된 큰 기업이다. 그곳에서 후배들의 소식, 동기들의 근황, 당시 호스텔 생활과 봉사단 선발·파견 과정, 현지 활동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최근에는 정년퇴직 후 봉사단에 지원하는 경우도 많아 평균 연령이 크게 높아졌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예전과는 너무나 달라진 제도였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함반토타 WDF의 현재 상황을 걱정하며, 작은 도움이라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여러 대안을 이야기했지만, 결국 문제 해결의 중심에서 기꺼이 움직일 사람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닿았다. 서로 더 고민해보자며, 기약은 없지만 SNS로라도 흔적을 남기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호텔로 돌아와 샤워로 땀을 씻어내고 예정된 오후 일정을 위해 다시 외출했다. 신혼부부의 안타까운 사정으로 가족 다섯을 한꺼번에 만나 위로 겸 햄버거 잔치를 해야 했던 상황도 있었다. 한국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작은 무역을 하던 현지 인연이 딸의 결혼을 기념해 한국 여행을 계획했지만, 비자 반려와 여행비 환불 문제로 큰 상심을 겪고 있었다. 한국에 대한 원망이 깊어질까 걱정되어 해결 방안을 함께 모색했고, 출국 전 한 번 더 만나기로 했다. 오지랖이 넓은 나의 성정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 치료를 마쳤다고 여기고 임지로 돌아가 다시 열심을 냈더라면, 아마도 오늘 이런 일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결정을 다시 되새겨보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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