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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양관식이라는 아빠들의 착각

정말 그리 온 마음으로 대했을까?

by Aheajigi

지나친 감정 이입 탓인지 아니면 주제 파악을 못하는지 그것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기억하고픈 것만 선별적으로 꺼내고 조작하는 탓인지 모르겠다. 사람의 기억은 생각보다 조작이 잘 되며 나이가 들수록 체계적 변조를 거듭한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자신들의 유년 시절을 거한 능력으로 포장하고 날개를 펼치지 못한 것을 전부 빈약한 제반 환경 탓으로 돌린다.


스스로의 능력 부족이었음을 시인하는 올드 세대들이 절대적으로 희박한 이유이다.

어찌 보면 동일한 맥락이다. 자식을 키우는 아빠란 포지션에서 모두 자신을 드라마 속 양관식처럼 착각하는 원인 또한 자의적 기억 조작이지 싶다. 이것이 양육을 놓고 자녀와 아빠의 온도차가 큰 까닭이다.

스스로를 양관식이라 자부하는 착각 아빠와 학씨와 가깝다 속으로 되뇌는 자녀! 어쩌누!


자신을 양관식처럼 온 마음을 다해 자녀를 키웠다 오판하는 것은 아마도 작은 이벤트들을 크게 부풀렸기 때문일 것이다.

자녀를 위해 하던 일을 내동댕이치고 달려가는 아빠가 몇이나 될까? 난 교실애서 꼬맹이들과 있어 안다. 아이가 아프다 힘들다 울면서 집에 전화해 달라 한다. 그러면 몇 번의 시도를 해서 양육자들과 연락을 취한다. 힘들어하는 아이를 위해 황급하게 달려오는 부모는 열에 한둘이다. 그나마도 아빠가 빛의 속도로 오는 일은 없다. 모두 제 할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하여 수업하며 아픈 아이에게 신경 써가며 정신없이 있다가 아픈 아이를 양육자에게 인계 보낸다.

양관식 같은 아빠라? 그게 누구신지 난 학교에 있는 지난 25년간 겪지를 못했다.

물론 어디엔가 양관식 같은 아빠가 있을 수 있다. 아니 꼭 있었으면 싶다. 그래야 삶이 희망적일 테니 말이다.

아마 양관식 같은 아빠가 있다면 그는 절대로 스스로가 양관식이라 자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빠 양관식은 늘 딸이나 부인에게 못해준 것을 미안해했기 때문이다.

양관식은 스스로를 완벽한 아빠라 여기지 않았다. 완벽한 아빠란 착각을 자신이 믿어버리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온마음으로 가족을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빠로서 완벽에 만족하면 주저앉기 마련이다. 아빠 역할 만족에 빠진 양관식은 그 이후부터 더는 양관식이 아니다.


아들로 그리고 남편으로 살아왔지 아빠가 처음인지라 늘 어설프고 부족하다. 매번 행동하고 후회하며 반성하는 내게 양관식은 범접할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정말 내가 양관식처럼 온 마음을 다해 아내와 아들을 대하고 있는지 미안스럽기만 하다.


난 양관식이 아닐뿐더러 그리 될 자신도 없다. 단지 믿고 기댈 든든한 벽이자 안전한 그물이 되기 위해 마음 한 자락 남기지 않는 노력하는 아빠였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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