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ess to us, Cheers!
어느 금요일 오후 여섯 시. 나는 우리 팀원들과 함께 회의실에 앉아있다. 일요일 비행기 편으로 중국 출장가시는 팀장님 지시로 월요일 아침으로 예정되었던 주간회의를 미리 하는 중이다. 퇴근시간이 지나도록 회의는 끝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몰래 스마트폰을 켜고 기차표를 취소한다. 괜찮아, 버스는 늦게까지 있으니까. 그래도 금요일인데……. 야속한 마음이 든다. 일주일 넘게 만나지 못한 아이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지난주는 월 정산에 분기정산까지 겹쳐서 주말에도 사무실에 나와 일했다. 이번 주는 꼭 아이를 만나러 가야 한다.
세상은 나를 워킹맘이라고 부른다.
나는 집 밖에서 일하는 엄마다.
그리고 주말에서야 아이를 만나러 가는 기러기 엄마다.
결혼 후 다행히도 금세 아기가 생겼다. 출장길에 입덧으로 토하고, 퇴근 때면 다리가 붓고 아파서 전철역에서 슬리퍼로 갈아 신고 집으로 돌아오는 하루하루 중에도 아기는 무사하고 건강하게 자라 주었다. 아기가 태어난 후에 하루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 생각으로 출산예정일까지 근무를 했다. 아기는 축복 속에서 태어났고, 회사에서도 나의 출산을 축하해주었다. 산전 후 휴가 90일만 쉬고 다시 나와 일하던 과거에서 1년의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것이 더 일반적인 분위기로 바뀌는 중이라 나도 1년간 아기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복직 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태몽을 꿨는데 둘째가 생긴 것 아니냐는 시어머니의 질문에 나는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요, 어머님." 그러나 시어머니가 맞았다. 우리 부부 모두 철야도 잦고 야근도 많아서 집에 오면 잠들기 바빴던지라 하늘을 볼 기회도 손에 꼽기 민망할 정도로 적었는데도 둘째 아기가 생긴 것이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1년 동안 일한 후 다시 아기를 낳았다. 그리고 회사의 배려로 둘째 아이도 1년 육아휴직을 얻을 수 있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 둘 낳으면 퇴직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지만 나는 퇴직할 수 없었다. 우리 집 경제 사정이나 우리 부부의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 내가 일하지 않으면 우리의 노후대책은커녕 아이들 교육도 시키기 어려울 것이 뻔했다. 내가 회사에 다시 나가면 누가 아이들을 돌보지? 어떻게 해야 하지? 복직을 앞두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첫 아기가 태어나고 백일 즈음이 되었을 때 어린이집에 입소대기 신청을 했다. 맞벌이 가정에 0세 영아였지만 대기번호는 425번이었다. 그나마 대기가 짧은 가정어린이집에 맡기는 것도 생각해보았으나 아침 6시 출근, 퇴근은 기약 없다. 5시에 칼퇴근해서 집에 오면 저녁 7시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남편도 마찬가지, 퇴근은 더 늦다. 아이가 새벽부터 일어나서 하루 13시간 넘게 남의 집에서 지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경북 영주에 계시는 시부모님께 아이를 보내기로 했다. 손주를 사랑하시는 시부모님께서는 흔쾌히 아이를 맡아주시기로 했다. 아이와 헤어지는 연습을 하기 위해 아이와 함께 시댁으로 가서 1달씩 지내기를 두 차례 했고 아이에게 자주 이야기를 해주었다.
"엄마, 아빠가 회사에 가서 돈 벌어올게. 할머니, 할아버지와 잘 지내고 있어. 엄마가 얼른 올게."
육아책이나 전문가들은 어린이집에서 좀 힘들더라도 부모와 한 집에서 살고, 한 집에서 자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이를 지방에 사는 시부모나 친정 부모에게 맡기고 일주일에 한 번 보러 가는 건 절대 반대라며, 잠깐이라도 매일 얼굴을 보며 살을 부대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천양지차라는 소아정신과 의사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시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주말 가족이라는 선택을 했다.
"어머나, 주말마다……. 힘들겠어요. 아이는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을까."
나의 사정들을 이야기하면 아이가 없는 여직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아이가 있고, 아이를 키워본 선배 직원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말한다.
"대리님은 복 받았네! 아이 봐줄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큰 복이야!"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며 출근하고, 퇴근하면서 아이를 데려오고, 아이가 아프면 회사에 아쉬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겪은 선배들은 그 과정이 정말 힘겹고 어렵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를 지방에 계신 시부모님께 맡겼다는 내 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줌으로써 나를 위로하고, 더 기운 나게 해주는 것이다.
첫째와 둘째를 같이 시부모님께 보내야 한다.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마음에서는 자꾸 미련이 남아서 나는 집에서 가까운 회사에서 나온 구인 공고가 없는지 수시로 들여다보았다. 시댁 근처의 회사에서 일하면 아이들과 밤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영주 지방 구인공고도 함께 찾아보았다. 여러 가지 조건이 맞지 않아서 실망스러운 기분만 들면서도 혹시나 좋은 자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자꾸 뒤져보았다. 그러면서 늘 '내가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도록 배려해준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야겠다.'하고 마음을 다지는 걸로 끝난다. 그러나 미련은 남아서 괜스레 열심히 일하면서 글도 쓰느라 바쁜 남편만 닦달하며 어서 작가로 성공해서 내가 회사에 다니면서 아이들이랑 같이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투덜대기 일쑤다.
어쨌든 아이들을 지방에 보내기로 마음을 굳히고 나니 용기가 솟는다. 아이들도 열심히 적응하고 나도 열심히 일해서 성공해서 같이 살아야지 생각하며 아이들 짐을 챙긴다.
내가 서울로 돌아오면 나의 빈자리를 찾아 이쪽 방, 저쪽 방 기어 다녔다던 큰 아이. 주말에 퇴근하자마자 달려온 나를 보고 쑥스러워서 얼굴만 바라보며 생긋생긋 웃던 큰 아이. 형과는 다르게 내가 없을 땐 엄마를 찾아다니지 않고 씩씩하게 놀다가, 주말에 만나러 온 내 품에 매달려 엉엉 울면서 엄마엄마 소리 지르는 둘째 아이. 아이들의 빈자리가 너무 커서 어질러진 장난감을 정리하지 못하는 남편.
저녁식사를 마치고 시댁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를 타러 나가면서 아이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아이들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마음이 많이 아프고 여러 상황에 체념할 수밖에 없는 나에게 화가 났다. 그래도 우리들이 가는 이 길을, 쉬운 것이 하나도 없지만 나와 남편과 아이들은 울면서도 부지런히 간다.
2년 만에 만난 친구는 점심시간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내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아이들을 어찌 했냐고 물었다. 공무원 부부인 친구는 내 아이들과 동갑인 두 아이를 키우면서 3개월 전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해서 정신없이 바쁘던 중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지방에 보내지 말고 회사를 옮기던지 그만두던지 하여 아이들과 같이 지내라고 조언을 건네며 말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너를 걱정해서도 아니고, 너의 시부모님 건강을 염려해서도 아니고, 다만 아이들을 위해서야."
친구의 말에 나는 배시시 웃었다. 어차피 서로 뻔히 짐작이 되는 사정인데 내게 이렇게 말해주는 마음 씀이 고마웠다.
그러나 20여분에 걸친 조언을 멈추고 나서,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아침 출근길에 3세, 1세 된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물 마실 시간도 없이 뜨겁게 일하다가 애써 칼퇴근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들어간다. 집에 가면 아이들 씻기고, 빨래하고, 설거지 하고 나면 겨우 자신이 씻을 짬이 난다고 했다. 그나마도 남편이 아이들을 잘 돌보는 편이고 요리도 즐기기 때문에 자신이 밥은 차리지 않아도 된다며 기쁘다고 했다.
가장 빨리 등원하고 가장 늦게 하원 하는 게 자기네 애들이라며 그녀는 쓰게 웃었다.
"사실 너무 힘들어서 남편에게 육아휴직 쓰라고 했어. 지금은 남편이 애들도 더 많이 돌봐주고, 집안일도 더 많이 하고 있어."
남편이 공무원이니까 가능한 일이긴 하지, 하고 말을 줄이는 친구는 최근엔 아이들과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기 위해서 근무지 근처로 이사도 했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도 자라니 점점 괜찮아질 거야."라는 것이 친구의 셀프위로였다.
"그래도 아이들은 부모와 같이 살아야 해. 내 말 알지?"
점심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다시 들어가며 그녀는 다짐받듯 내게 말했다. 나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친구를 배웅했다.
친구네 부부가 그렇듯이 나와 남편도 서로 잘 하는 집안일을 골라한다. 나는 정리와 청소를 하고 남편은 요리를 한다. 설거지와 빨래는 우리 사이에선 일종의 게임이라서 먼저 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아이들을 돌볼 때 도움이 필요하면 큰 소리로 도와달라고 외친다. 우리 집에서는 아이를 돌보는 것이 1순위이기 때문에 나와 남편은 서로가 도와달라고 할 때 열일 젖혀두고 달려간다.
그러나 남편은 빨래를 대충 털어 널어서 주름이 남은 채로 마르게 하고, 설거지 후 개수대를 닦는 일이 없다. 청소는 드러나 보이는 바닥만 하고 구석이나 매트 아래는 잘 챙기지 않는다. 사용한 기저귀나 티슈가 바닥에 그냥 놓여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나 나는 남편의 그런 점들도 고맙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뒹굴뒹굴하는 것보다 천 배 만 배 낫다. 그리고 친정어머니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남들도 네가 해놓은 일을 보면 꼭 모자란 점이 보인단다. 원래 그런 거야."
내가 남편이 해놓은 집안일이 어설프게 느껴지듯이 다른 사람들도 내가 해놓은 일이 어설프고 완벽하지 않게 느낄 것이다. 나도 부족한 사람이니 남편의 부족함도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육아도 또한 그러하다. 부모가 돈을 벌어, 부모 스스로 아이들을 잘 돌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몸은 하나고 시간도 정해져 있으며 돈을 벌고 모을 기회도 한정되어있다. 모든 것을 내 뜻과 같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내 육아를 부족하게 여길 것을 떠올리며, 나 또한 남편,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육아를 인정하고 너그럽게 보아야 한다.
복직을 하루 앞두고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다시 읽어본다. 선생님께서도 30년 넘게 교사이자 어머니, 두 아들의 워킹맘으로 사셨기에 내 사정에 공감하며 내 마음을 위로해주셨다.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너는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어쩌면 좋니. 얘야. 얘야."
"제가 부족해서 그렇죠, 뭐."
내가 말하자 선생님께서는 손사래를 치셨다.
"그렇게 말하지 마라. 너는 열심히 잘 하고 있어!"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손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 편지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할머니에게서 네가 못 주는 것을 배워올 것을 믿으며…… 네 앞날을 축복한다.'
선생님의 편지를 인용하여, 모든 워킹맘들의 앞날을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