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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수 11

가압류

by 전소

소송의 서막이 올랐기 때문에 그동안의 자료들을 정리했다.

사건경위서를 작성해 보았는데 생각보다 자료가 방대하여 거의 3일이 걸렸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만든 자료를 변호사님이 꼼꼼하게 확인해 줬으면 했지만 일단 소장이 오면 시작하자는 입장이다.

나만 급하고 나만 중요하지 뭐.


한편 관리소는 일전의 공문에 대한 아무런 답이 없었다. 하여 공동주택분쟁위원회에 누수의 원인이 공용 배관인지 아닌지에 대한 조정 신청을 냈다.

하지만 이 또한 상대편이 응할 경우만 조정이 가능하고 거절할 경우는 그냥 거기서 끝이라고 한다.

그래, 기대도 안 했다.


연휴의 시작 전 왠지 모르게 뒷골이 싸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나 해서 등기부등본을 열람해 보았다.

이상하게도 자꾸 오류가 나서 화면이 보이지 않았다.

몇 번 다시 고침을 시도한 뒤에 나온 등기부등본에는 가압류가 걸려있었다.

아랫집이 제시했던 집 전체 수리하는 견적서 금액이 가압류로 박혀있었다.

이렇게 쉽게 견적서 한 장으로 가압류가 걸리는 것이다. 나는 그 금액만큼을 법원에 공탁해야 가압류를 해제할 수 있다고 한다.


뭔가 외부에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와다다 떨어지는데 피할 수도 없고 그냥 맞고 있어야 하는 느낌이다.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말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일들이 벌어졌을 때 내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그것만은 내가 컨트롤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한다고.


그런데 나는 계속 심장이 두근두근 떨리고 긴장이 된다. 내면의 컨트롤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연휴에 마지막으로 지방 집 현장 사진을 확보하러 갔다.

그런데 가는 길 내내 심장이 요동쳤다. 혹시나 아랫집 집주인을 만날까, 관리소 사람들을 마주치게 될까 무서워서 심장이 조여왔다.

사실 내 집에 내가 가는 것이고, 내가 뭔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다 내 탓인 것 같고, 다 내 대응이 잘못되어 이 지경까지 된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면서 마음은 한 없이 위축되고 쪼그라들었다.


내 마음속의 공격의 대상이 나로 바뀌는 흐름을 따라다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이 오버하지 마소. 누구나 살면서 마주친다는 재수 없는 일들이 나에게도 생긴 것이다.

스스로를 갉아먹으면서까지 괴로워할 것도 좌절할 것도 없지 않을까.

삶 속의 크고 작은 사건 사고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항상 당당하게, 자신감 있게, 눈에 힘빡주고! 하라던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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