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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공 Apr 11. 2024

[노동 일기 #4] 매너리즘 추종자의 변

무료하고 싶은 하루잖아!


매너리즘(Mannerism)의 사전적 의미는 틀에 박힌 태도나 방식으로 신선미와 독창성을 잃는 일.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현대인들은 절대 빠지면 안 되는 것, 혹시라도 빠졌다면 필사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니… 퍽 부정적이다.


단어의 유래가 재밌다. 르네상스에서 바로크 미술로 이행하는 사이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과도기적 미술 양식을 매너리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기존의 방식이나 형식을 답습했다는 뜻으로 쓰였는데, 르네상스 미술이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조화를 추구한 것과 달리 부자연, 비대칭, 과장 등을 특징으로 한다. 매너리즘은 고전주의 미술이 높게 평가받던 흐름에 등장한 탓에 당연하게도 부정적으로 쓰였다. 하지만 그것을 나름의 개성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매너리즘이 막 그렇게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는 이유는, 내가 매너리즘 추종자기 때문이다.


인생 최대 목표였던 취업에 성공한 어느 시기. 대부분이 그렇듯 당시 내 인생은 매너리즘과 무관했다. 끓었고, 달렸고, 뿌듯했다. 그 시기 자기소개서 속 나는 도전적이고 매사에 긍정적이며 사람 만나기를 좋아했다. 스트레스야 당연히 있었지만, 그건 생산적이라고, 그것이 날 발전시킨다고 믿었다.


물론 조금 지나 계획 없이 매너리즘에 빠졌다. 기자 2년 차였다. 바이라인이 무색하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기사를 발행하는 것에 신물 났다. 대학생 때 꿈꾸던 멋진 사회인이 아니었고, 30대가 돼도 달라지는 게 없을 것이라는 상실감에 빠졌다.


빠졌으니 극복해야지. 방법은 간단했다. 새로운 도전. 그렇게 처음 홍보 업계에 발을 들였다.


홍보대행사에서의 삶은, 처참했다. 겨우 2~3년도 경력이라고 이름 뒤에 대리를 붙였는데, 할 줄 아는 것은 인턴보다도 없었다. 무한상사를 떠올리지 않곤 회사의 직급 체계도 낯선 때였다. 비즈니스 메일을 써야 하는 상황에선 식은땀부터 났다.


첫 단추를 늦게 꿰었으니, 남들보다 더 재빨라야 했다. 전공 서적을 사서 읽었고, 오가는 메일을 하나하나 읽으며 톤 앤 매너를 익혔다. 글을 잘 쓴다고 자부했던 것이 무색하게 단어 하나에도 끙끙 앓았다.


새로워 좋다고 자위하고 싶었으나 매일이 낯설었다. 하루가 멀다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 제각각의 그들에게 나를 끼우고 장단을 맞추는 일,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도 밝게 받고, 어떤 순간에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일, 어느 날엔 “너 몇 년 찬데 감히 나한테 전화를 해?”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일, 내 시간을 내 계획대로 쓰지 못하는 일이 무서워졌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겁났고, 그래서 하루가 감흥 없이 흘러가기를 바랐다.


그때쯤 내가 극복하고자 했던 매너리즘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것이 단순히 안정된 상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절절하게 인생의 파도가 잠잠해지기를 바라던 때가 있었다.


거센 파도에 매일 멀미하면서도 멋진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고, 버티면 좋은 날 온다고 믿었다. 자주 흔들릴 때마다 잡아주는 동료들이 있어 약 5년을 버텼다.


단순히 고단했던 시간이 날 매너리즘 추종자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그사이 나는 30대 중반이 됐고, 꿈꾸던 모습이 아닌 지금도 그런대로 인정할 수 있게 됐다. 인생에 일 외에도 중요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고, 너무 힘이 들 땐 도망치는 것도 용기라는 것을 알았다.


이직 후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됐다. 다행히 예전보다 의연해졌기에, 낯선 상황에도 그런대로 적응해 가고 있다. 어느 날엔 직책자가 말했다. “대행사에 비해 업무가 하드하진 않죠? 매너리즘 온다고 할까 봐 걱정이네.” 나는 웃었다. “저 매너리즘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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