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영어를 공부한다는 것
나에게는 70대 할머니가 되어서도 함께 차를 마시는 모습을 그려보게 하는 친구가 있다. 우리는 같은 보건계열학교 출신으로 일찍이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어디 은행의 어느 지점이 적금이자가 높은 지를 공유하며 나름 성실한 20대를 보냈다. 사회 경력 7년 차 무렵, 유럽 여행이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우리도 자연스레 그 흐름에 합류하게 되었다. 일주일의 짧은 휴가동안 프라하와 파리를 야무지게 돌아보기로 한 여행이었는데, 첫날부터 일은 순탄히 흘러가지 않았다. 한국에서 출발한 짐이 경로를 이탈하고 만 것이다. 우리는 가지고 있던 돈, 핸드폰에 의지해 겨우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행할 무드를 되찾기엔 무리였기에 일단 끼니나 때우자는 심정으로 숙소 앞 맥도널드로 향했다.
지금은 회나 파스타에 맥주를 함께 즐기곤 하지만 요즘처럼 맛집이 그리 많지 않던, 20대였던 우리의 메뉴엔 종종 프랜차이즈 햄버거가 자리했다. 다소 입이 짧은 우리는 햄버거 세트 하나와 햄버거 단품 하나를 시키곤 했는데, 이는 프렌치프라이와 음료를 공유하는 합리적인 메뉴 구성이었다. 그날도 어느 때에 다름없이 주문을 하는데, 직원은 자꾸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손가락으로 메뉴판의 세트와 햄버거 단품을 꾹꾹 찍고, 검지 손가락 하나를 세워 ‘원!’이라고 외쳐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점원은 매니저를 불러왔지만, 그들은 우리의 합리적인 메뉴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짐 문제로 지친 탓에 결국 항복의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다 먹지도 못할 프렌치프라이가 한가운데 가득 쌓인 채로 우리는 다짐을 했다. 올해는 꼭 영어공부를 하자고.
언젠가 다시 파리를 갈 일을 꿈꾸던 20대의 청년은, 햄버거 세트 하나를 다 먹지 못하는 건 여전하지만 여행에 흥미가 사라진 40대가 되었다. 여행 자체에 흥미가 사라졌다기보다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유명한 관광지를 도는 여행을 하기엔 나 자신을 너무 잘 알아버렸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느 여행지를 가더라도 맛집을 검색하기보다는 가장 가까운, 혹은 매력적인 책방이 있는지부터 검색하는 사람이 되었다. 여행지를 먼저 정하는 것이 아닌, 편안하게 책을 보며 쉴 수 있는 숙소 주변이 여행지가 되어버리고 마는 그런 사람. 나를 안다는 것은 삶을 심플하고 만족스럽게 하는 일이 되어주었다. 여행을 하는 일도 영어 공부를 하는 일도 모두 나를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결과가 만족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젠 햄버거 가게에서 유창하게 메뉴를 주문하는 일은 꿈꾸지 않는다. 프렌치프라이가 남는 일이 뭐 대수일까. 대신 나는 매우 조용한 여행을 버킷리스트에 담고 살아간다. 단출하게 배낭을 메고 런던으로 떠나는 모습을 그리곤 한다. 사실 런던이란 도시는 잘 알지 못한다. 우연히 런던의 한 서점 분위기에 반한 일이 영어라는 취미와 만나 나의 유일한 버킷리스트를 만들어냈다. 세월의 깊이가 곳곳에서 느껴지는 서점을 둘러보며 배낭 가득 책을 담고, 인생 책이라 불리게 될 책을 만나는 운명적인 순간을. 어느 카페 한편에 그들의 일상을 배경 삼아 진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책을 읽는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 가득 행복감이 퍼진다. 시간이 흘러 여전히 유창하지 않아도 괜찮다. 더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나를 지속하게 하는 걸 이제는 안다. 20대의 파리가 영어에 대한 꿈의 시작이었던 것처럼, 40대에 만나는 런던은 나에게 또 어떤 꿈을 안겨줄까. 확실한 건 낯설지 않은 새로운 다짐과 함께 돌아오리라는 것이다. 올해도 꼭 영어공부를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