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배운다는 건, 가능성을 그리는 일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의외로 작은 변화가 큰 방향을 만들기도 한다. 나의 20대에는 적응, 순응, 힐링 같은 단어가 자리했다면, 30대에는 도전과 실패 그리고 발견 같은 꽤나 진취적인 단어들이 등장한다. 낭만의 시간을 지나 성장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이런 흐름의 시작점에는 영어가 있었다. 다소 뜬금없어 보이지만, 매일이 무탈하길 바라던 잔잔한 호수에 던진 작은 돌멩이 같은 존재였다고 할까. 내 안 어딘가 스멀스멀 올라오던 '해보고 싶다'라는 감정은 실로 어색하고 낯선 것이었다. 불현듯 시작된 영어와의 인연이 어느새 10년이란 시간을 넘어왔다. 이제는 더 이상 놓아줄 수도 없는 내 인생 중 하나의 키워드가 되었다.
사실 누군가에게 영어를 10년 넘게 해 왔다는 말을 하기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누군가는 1년 안에 가뿐히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의 영어는 겨우 초급의 다리를 건너온 수준에 불과하다. 무난한 수준의 글을 읽고 들을 수 있으며, 머릿속에서 한차례 지진을 만들어내고서야 간단한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영어가 아니라도 상대 평가는 대체로 가혹하다. 그래도 주어와 동사의 정도만 구분하던 시절을 지나 여기까지 왔으니, 그간의 애씀만큼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려 한다.
그럼에도 짧지 않은 시간이기에 왜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면 사색하며 걷던 산책에서 속도를 붙여 천천히 때로는 조금 숨이 차도록 달리기도 했다. 가끔은 무리한 도전에 뛰어온 만큼 쉬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행히 그런 시도들이 있었기에 여전히 나는 트랙 안에 있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 했는데 그만두겠다고? 반복해서 들리는 내 안의 목소리는 꽤나 묵직했고 한결같았다.
영어를 '정복'하고 싶은 이에게는 나의 이야기가 가닿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나와 그에게는 영어라는 존재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 이는 매우 당연하다. 모두가 나와 같은 마음으로 영어를 바라보지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지극히 개인적인 영어 이야기를 연재라는 형식으로 길게 이어온 것은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였다.
가능성 (명사)
1. 앞으로 실현될 수 있는 성질이나 정도
2. 앞으로 성장할 수 있는 성질이나 정도.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니, 이제까지 나의 삶을 지탱하던 가치들이 더 이상 빛나지 않는 순간이 왔다. 세상은 결혼한 여자 그리고 엄마라는 이름 안에 나를 끼워 맞추라고 말했다. 나는 그 과도기를 참 아프게도 지나온 듯하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벽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때로는 결혼을 하지 말걸, 아이를 낳지 말걸, 하는 의미 없는 후회도 있었다.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불가능해 보이던 그 시절, 영어가 내 곁에 있었다. 영어는 나를 돌보고 위로했다. 가능성을 그리며 조용히 꿈을 꾸었다. 내일은 조금 더 좋아질 거야, 영어도 나도.
어린이집을 다니던 아이는 어느새 팔다리가 길쭉해진 초등학생이 되었다. 매일 저녁 식사 후, 아이의 영어 공부를 돕는다. 때로는 단어의 발음을 묻고, 나의 발음을 듣고 따라 하는 아이를 본다. 아이가 잠자리에 들어가면 혼자가 되어 노란 불빛으로 가득 채운 책상 앞에 앉는다. 질문 하나를 붙잡아 대여섯 줄 영어 문장으로 생각을 써 내려간다. 여전히 노트북을 열고 글을 쓸 공간을 찾는 손길에는 작은 부담이 얹어진다. 하지만 생각의 끈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영어는 글 쓰는 일을 그저 돕고 있다. 부담의 무게는 사라지고 가벼운 타자소리가 시간과 공간을 채운다. Chat GPT로 문법 오류를 교정받은 뒤 정돈된 영어를 노트에 적어본다. 노트를 덮으며 영어가 깃들어진 순간들을 음미한다. 기분 좋은 에너지가 온몸을 휘감는다. 이제는 나도 영어도 '평온하게' 성장 중인 것 같아서.
위계와 관습, 형식으로 빽빽하게 얽혀 있는 뉘앙스의 숲에서 빠져나와 프랑스어로 건너가는 순간, 내 몸을 칭칭 휘감고 있던 밧줄이 다 풀려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절대 내 것이 될 일 없는 이 '남의 언어'에서 해방감을 느끼는 상황을, 모국어는 한없이 무겁고 복잡하게, 완벽하지 않은 이 외국어는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지는 이상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곽미성 <언어의 위로> 중에서
우월성의 문제가 아니다. 각각의 언어가 품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날 입는 옷이 묘하게 나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비슷하달까. 영어를 입은 나는 어떤 사람일까? 모국어로는 미처 발현되지 못한 나의 일부가 영어라는 옷을 입은 모습을 그려본다. 새삼 내 세계가 얼마나 작은지 감각한다. 두 눈과 두 발로 모든 곳을 직접 경험해 볼 순 없지만, 언어는 다르다. 나의 세계를 확장하기에 이처럼 좋은 도구가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유연하게 살고 싶다. 내가 경험한 세상만이 옳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싶지 않다. 안타깝게도 그런 어른들이 주변에 너무도 많아 더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본 그들의 세상은 대체로 좁았다. 숨이 막힐 만큼. 경험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유연함의 문제였다. 나와 다르거나 내가 모르는 삶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용기. 그건 관성의 힘을 넘어서는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어는 나에게 말해준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여전히 많다고. 그러니 계속 호기심을 갖고 배워나가자고 말이다.
이쯤 되니 10년 동안 고작 '이 정도'의 실력이면 어떤가 싶다. 이는 분명 토익 900점대와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이지 않은가. 오늘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영어를 만난다. 여전히 만나지 못한 세계 어딘가로 날 데려가기를 기다리며. 지금 당장은 누군가에게 영어 가능자라고 자신 있게 목소리 내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그래도, 계속 좋아하려고 한다. 나의 영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