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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치 Jul 12. 2018

권력의 관습 : 항공사의 만행



최근 대한항공에 이어 아시아나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두 항공사의 갑질이 논란이다. 지금이야 그 화력이 말 그대로 불같지만, 이 ‘갑’들을 향한 돌팔매는 곧 정리될 것이다.

납득할만한 처벌을 통해 성공사례로 박수받거나, 시간이 흘러 망각의 잔여물로 회자되겠지.


오해는 마시길.

이건 그저, 뭣도아닌 한 유권자의 견해일 뿐이다.



다소 회의적인 말투로 시작한 오늘의 이야기는 며칠 전 한 지인과 나눈 대화로부터 비롯되었다. 어려서부터 스튜어디스를 꿈꿨던 지인, A는 순조롭게 항공운항과에 입학했고, 오랜기간 메이저 항공사 취직을 목표로 준비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A는 과연, 큰 키에 날씬한 몸매, 단아하고 예쁜얼굴이 익숙하게 보아 온 항공사 승무원의 이미지와 꼭 닮아있었다.


아시아나 모델 당시의 한가인.


어려서 공항 한번 가본 적 없었던 나에게 항공사 승무원이란 줄곧 연예인같은 존재였다. 더군다나 당시 아시아나의 메인모델은 배우 ‘한가인’이었는데, 그 아름다움이 가히 비현실적인 수준이었다고 기억한다. 이후로 나는 스튜어디스라는 직업을 준 ‘미스코리아’급으로 분류했던 것 같다.


그 생각은 별다른 마찰없이 그대로 발전해, 스튜어디스가 되려면 오로지 외모, 그것도 빼어나게 아름다운 외모여야 한다고 단정짓게 되었고, 여기에 유창한 외국어능력이 추가되면서 ‘항공사 승무원’이 되는것은 거의 신적인 영역으로까지 올라서게 되었다.


‘자존감 높은 커리어 우먼’이라고 할까. 나에게 스튜어디스는 똑똑하고 멋진 여자의 표상같은 것이 되어있었다. 이번일로 그것이 겨우 내 환상에 지나지 않았음이 여실히 드러나 버렸지만.



엄청난 망치다. 심지어 맞기도 전에 눌렸어.


그러니까, A는 이명희씨의 폭력적 품행이나 아시아나의 과잉의전 사실을 교수님으로부터 ‘배워서’ 이미 알고있었다고 했다. 회사의 연혁처럼 오랜시간 이어져 온 그것이 잘못인 줄은 전혀 몰랐다고 했다. ‘원래 그렇다고’ 이해해 온 이 일이 이슈가 되어 언론의 뭇매를 맞는 이 상황이 A에겐 오히려 충격이라며, 경직된 얼굴로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그 고백에 화답했다. 만약 초기의 목표대로 항공사에 입사했다면, A는 지금껏 오너일가의 만행을 ‘직장인의 고충’쯤으로 견디는 승무원이 되었을 것이다. 술 한잔에 사회생활의 매서움을, 또 한잔에 모욕당한 수치심을 털어내면서.







오늘 나는, 아시아나의 ‘과잉접대’에 준하는 회식문화를 배우고, 또 가르쳤던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던 경험으로 이 글을 쓴다.


내가 일했던 모 회사의 임원회식 역시 아시아나의 그것처럼 보스를 위한 노래와 춤을 준비해야 했다. ‘사랑해요’같은 일차원적 애정표현은 예사였고, 명언을 차용하는 센스는 덤이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긴 회식에 드디어 전무님이 취해 귀가하시면, 다음 직급자인 부장님을 위한 시간이 이어졌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때부터가 진짜였다. 회식에 보이는 성의가 곧 열정의 증거였다. 우리는 그 열정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놀았다. 노래방에서 춤을 추다 신발 밑창이 떨어져 나간 이는 그 경험을 훈장처럼 자랑했다.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의 이야기다.


첫차가 다닐 시간에야 끝나는 주기적인 회식에 신입 직원들이 불평할 때면, 나는 내가 배운 그대로 이것이 ‘회사생활’임을 그들에게 각인시켰다. 여기는 돈이라도 주지, 딴데가면 죽도록 술만 퍼먹고 집에도 자비로 가야한다고.


그날, 후배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임원진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비슷한 부류의 괴물이었을 것이다.

그날, 조언이랍시고 후배에게 했던 그 말을 후회한다. 그를 포기하게 만들었을 그 순간을,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제 나같은 선배가 되어있을 그에게 사과하고 싶다.


여러명의 내가 모여 괴물을 키워왔음을 시인한다.




나는 오늘, 이 글을 통해 비단 당사자들의 퇴진만이 이 ‘혁명’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며, 또다른 괴물을 양산해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함을 말하려고 한다.

 

이 글은 사퇴만을 책임수단으로 평가하는 사회적 풍토에 대한 불만이며, 내 과오와 게으름에 대한 자성의 고백이다. 또한 누군가의 위에서 군림하는 모든 이들의 촉각을 곤두세우는 자극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은 글이기도 하다.


‘님 좋은 쪽으로 생각해드리는’ 자멸적 복종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악습은 그것이 옳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과정의 이정표로서만 후대에 전해져야 한다. 폭력을 권리로 쓸 수 있는 위치같은 건 없다. 역시, 용인 될수 있는 폭력의 범위 따위도 없다.


우리는, 익숙하게 배우고 따라온 일상적 폭력앞에 조금 더 날을 세워야 하고 그것이 옳은 일임을 모두가 긍정해야한다. ‘몰랐어요’ 따위의 변명 뒤에 숨지말고, 인정하고 반성하는 움직임이 커지길 희망한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다는’ 아우슈비츠의 독일인 간부가 생각나 울적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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