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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치 Jun 19. 2018

비행을 꿈꾸는 나의, 고해성사


학생때도 내돈주고 사본적없던 귀마개를 샀다. 스펀지같은 둥그런 형광색 스펀지를 손가락으로 꼭 잡고 눌러 압축시킨뒤에 귓구멍에 넣으면 점점 부풀어올라 원래의 부피를 찾는다. 부드럽게 귓속이 들어찬다. 마치 잠수한 기분으로 나와 세상이 단절된다.
사생활의 성역이 없는 지하철 , 나만의 고요를 찾는 순간.

아줌마 둘이 신나게 떠드는 남의 집 가정사, 쉴새없이 재잘대는 여학생들 수다, 지난주에 봤던 영화와 맛집얘기, 귀막고 싶은 연인간의 혀 짧은 소리까지. 처음으로 구매해 본 귀마개는 그것들로부터 나의 자유를 지켜주었다.

듣지 않을 자유를.




<파생의 읽기>는 모임을 같이 하는 친구, 두두가 읽어보라며 빌려준 책이었다. 서가 앞에서 편독하지 않지만 남이 추천한 책은 일단 거리끼고 보는 습관으로 나는 책을 받고도 한 주 넘게 첫장조차 펼쳐보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두두를 만나는 날. 나는 대충 감사의 말과 함께 읽은 척을 하며 책을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 최소한의 읽은척을 위해 지하철에서 좀 들춰볼 요량으로.

책 속에서 나는 수년 전, 딱히 튀는구석 없이 조용했던 친구 A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날로 되돌아갔다. 사원증을 목에 걸고 오피스룩을 차려입은 A가 꼭 ‘언니’처럼 말했다. 적당히 하라고, 걱정된다고. 알아서 잘 하겠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날, 부글부글 끓는 속을 들키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웃었다.


네가 뭘 알아.

엄마가, 선생님이 시키는대로 하고 자라

취향껏 취미 하나 만들지 못하는 너 따위가,

도대체가 변변찮은 꿈 하나도 키워본적 없는 너 따위가

대체 뭘 안다고 함부로 참견이냐고.

결코 하지못할 말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우리는 곧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로 자연스레 A와는 멀어졌다. 나를 걱정한다는 이들은 주위에 널리고 널려, 굳이 한사람 보태고 싶지 않았다.






글을 쓰고싶어 취업도 마다하고 고달픈 삶을 이어가는 저자와의 연결고리를 찾은 순간 나는 끝도없이 혼란스러워졌다. 두두는 여기에서 나를 봤구나. 그래서 읽어보라고 했구나. 내 얘기같아서.

아직 무엇도 이루어내지 못한 나의 처지가 남의 눈에도 그렇게 손바닥처럼 뻔히 보였단 말인가. 꿋꿋한척 고투중인 서른하나의 내 모습이.

스스로에게 하는 자책이란 나 자신에겐 작은 생채기 하나도 내지 못한다. 큰 상처를 입힐 말은 거르고, 내일부턴 더 잘해야지, 긍정의 자기위안으로 보낸 날들이 어느덧 수개월, 나는 꿈을 빙자해 마냥 놀고싶었던 것은 아닐까.

무엇도 이뤄내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이

또다시 나를 덮친다.



혼잣말이라 이름짓고 채워온 나의 글들은 정말 그 이름처럼 혼잣말로 끝을 맺고 말 건지.

내 이름 세글자를 달고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길 기대했던 나의 글들은 고장난 비행기처럼 엔진음만 가열차게 그르렁 대고 있다.

비행하지 못하는 내 꿈은 거기에 매달린 희망이 너무 무거워서인가, 날개가 시원찮아서인가.

아니면 그냥 내 그릇이 이정도일 뿐인가.



어제와 같은 아침인 것 같은데 왜 하루는 지나있고,
어쩌다 일주일이, 한달이, 육개월이 흘러있는지.
치열해야 살아남는다는 각박함이 싫어 내 하고싶은 일을 찾아 하겠다고 박차고 나온지 반년이 훌쩍 지났다.


행복의 농도가 옅어지는 동안, 치열한 공허함과 불안한 만족감 사이에서 나는 한발짝도 더 내딛지 못하고 그대로 더 깊게 가라앉아버렸다.

치열해도 제자리이거나 느긋해서 불안한 것, 둘 중에 어느 하나를 고르는 일은 아직 나에겐 너무 무겁고, 버겁다.

언제나 모든 선택이 그래왔듯이.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귀마개를 꺼내는 일이다. 세상의 소리로부터 귀를 막고 나를 보호하는 일.

고작 마음먹은 일을 다시한번 되새기는 일.




문득 아침이 두렵다.
어제와 똑같은 날이 될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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