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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치 May 19. 2018

이별의 위로? 닥치고 들어주세요.


사랑하되 우선순위는 언제나 나일 것.

생각의 중심을 상대에게 두지 말 것.

의식해 애쓰는 배려는 지양할 것.

나의 행복과 상대의 행복은 별개, 동일시 하지 말 것.


몇가지로 요약해 주장해온 나의 '건강한 연애학’은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도 L에게만큼은 맥을 못써왔다. 각자의 연애관이 판이하게 다른 탓이었다.


L이 말하는 연애의 조건은 남자의 넘치는 사랑과 배려였다. L은 상대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나는 L을 설득할 의지를 버렸다. 각자 알아서 하면 되지 뭐.


L은 지금의 남자친구와 결혼을 생각한다고 했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런 확신을 갖게할 만큼, 남자친구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L의 연애는 반년도 못가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요약하자면, L의 연애관에 맞는 사람이 아니었다.



좋았던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변해버린 거냐며 L은 괴로워했다. 마침내 나의 사랑학을 펼칠 절호의 기회를 맞아, 나는 자신있게 말했다.



“그건 네가 망친 관계야.

내가 말했지. 중심 잃지 말라고.”



L은 쓸쓸한 얼굴로 인정했다. 기운빠진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는 내 조언에 좋은 점수를 주었다. 쿨하게 잊고 다음에 잘하라고 북돋아주는 나만의 명언도 잊지 않았다.



“네 행복은 남자가 만들어 주는게 아니야.

배려의 조건이 사랑일 순 있어도, 그 역은 안돼.”



우리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잘 들어가라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L과 작별했다. 나의 일과 사랑에 취해 한동안 L을 만나지 않았다.


L과의 대화. 이후로는 첨부불가로 판단.


갑작스러운 이별에 수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지내다, 고통에 못이겨 L에게 연락을 했다. 위로받고 싶었다. 털어놓고 싶었다. 그사람이 보고싶다고, 이별을 인정할 수가 없다고 목놓아 울고싶었다.


잔인했던 그의 말과 미숙했던 나의 대처, 이별 후에 모든것이 망가져버린 나의 삶. 이 모든 이별의 참상에 대한 묘사를 끝내자, 묵묵히 듣고있던 L이 입을 열었다.



“그사람 잘못이 물론 크긴하지.

근데 너도 잘못했어.”



L의 대답은 예상했던 것도,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다.

아픈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면서 굳이 이별이야기를 L에게 들려준 것은 이런 말을 듣기 위함이 아니었다. L의 냉담한 발언에 나는 또한번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거기에 대항할 여력조차 없어 그저 듣고 있을 뿐.



“이미 끝난 일에 마음써서 뭐해.

빨리 털고 일어나. 며칠만 지나봐라. 또 다 잊고 놀겠지.”



더이상 L과의 통화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예의상의 인사로 서둘러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야속했다. 내 탓이라고. 내가 잘못했다고? 차인 건 난데?


나는 이 마음을 위로받기 위해 또다시 다른 친구를 찾았다. 친구 K는 오래도록 내 얘기를 들어주며, 이별의 상처와 L로 인한 아픔을 보듬고 위로해주었다. 훨씬 안정된 기분으로 K와의 대화를 마치고나자 괘씸한 기분이 든다. L은 진짜 생각이 있는거냐 없는거냐. 어떻게 그런 말을?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갑자기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L의 이별 당시에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해버린 거였다.

책에서 주워담은 잡식까지 동원해, 막 이별한 L에게 어줍잖은 컨설팅을 하려했던 내 경솔함에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야 깨달았다. 그날 내가 했어야할 일은 사후약방문같은 연애코칭이 아니라, 그저 L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었음을. 그땐 정말 몰랐었다. 위로랍시고 했던 내 말들이 네게 상처가 되었을 줄은.


나는 더 기다리지 않고 L에게 전화를 걸어, 그때의 일을 사과했다. L은 별것 아니라는 투로 사과를 받아주었고 본인이 했던 말 또한 사과했다.



돌아보면, 나는 조언을 한답시고 내 현명함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 똑똑함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상처받은 너를 아랑곳없이, 내가 하고싶은 말을 떠들어버린 것 같다. 거기에 건방지게 ‘조언’이라는 명분을 씌워, 안그래도 괴로운 네가 마냥 그걸 듣고 있도록 만들어버렸다.



이별로 세상이 무너진 사람에게 하는 조언이란, 좌절해 쓰러진 이를 일으켜 세우는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음을 다시한번 깨달은 일화.

그날, 내 심장을 후벼파는 듯 했던 L의 조언은

다름아닌 내가 했던 말이라는 기가 찬 사실을 통하여.


앞으로는 나대지 말아야지.


2018.05.17 많이 괜찮아진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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