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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Oct 15. 2024

나의 살던 고향은 쓰레기집

애달픈 기록(2)


* 이 글은 2024년 4월 2일, 브런치 작가를 신청하기 전 가장 먼저 쓴 주제였습니다. 가장 먼저 쓰기 시작했지만 가장 써 내려가기 힘든 이야기였습니. 작가의 서랍에 저장해 둔 글을 하나씩 꺼내 쓰다가 제일 밑에 남아있던 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발행을 목적으로 마무리를 하고서도 이렇게 단서를 만큼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이제 케케묵은 마음속 서랍에서 그만 꺼내두려고 합니다. 빛을 쬐는 과정에서 슬었던 감정의 자국들이 스러져가길, 빛나는 모니터와 핸드폰 위로 이 글을 훑어주는 당신의 눈빛에 힘입어 잔잔하게 마르길 바라 마지않습니다. 미리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육아휴직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은 모두 일상 속에 있었다. 놀랍게도, 그토록 아름다운 태평양을 바라보던 순간이 아니었다. 다소 후미진 우리 동네의 골목을 지나, 도서관으로 향하던 그 길의 일상이었다. 처음엔 그저 평일에 여유를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렇게 도서관에 가고, 또 가고, 책을 읽으며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바로 글을 쓰고 싶은 욕구. 그렇게 브런치 작가에 신청하고 선정된 후 글을 토해내듯 썼다. 삼키지 못하고 늘 머금고 있던 감정들과 마주하며 나를 쓰고 읽는 시간이었다. 내가 쓴 글을 읽고 또 읽었다. 처음에는 퇴고하기 위해서 읽다가, 나중엔 나를 헤아리고 쓰다듬기 위해 읽었다. 글자로 다시 태어난 그 시절의 나를 만났다. 다시 만난 내게 따뜻한 활자를 입혀주며 위로를 받았다. 그렇게 깨어난 는, 나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에도 빛 하나 던지고 밝혀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세계는, 불을 켜면 이름 쓰기도 끔찍한 검은 벌레들이 재빨리 구석으로 사라지던 장면처럼 내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분명 눈앞에서 사라졌는데도 나를 둘러싼 공간의 구석 어딘가에 살아있는, 어둠이 내려앉으면 언제든 어디서든 다시 기어 나올 끔찍한 것들. 그것들은 정말이지 알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잠깐 사이 나는 그 자취를 목격하는 바람에 알았고, 때로는 소리로 알았고, 촉감으로 알았다. 어찌나 개체가 많았던지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순간도 잦았다. 어느 순간에는 그게 매일 밤이 되었다. 그저 기어 다니는 벌레인 줄만 알았던 그것은 가끔 새처럼 날아다니기도 했다. 내 눈앞을 스치며 날아가는 그것을 본 날, 급기야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다. 이것이 사람이 사는 집인지 벌레의 집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매일 밤 그 집에서 자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밤이 되면 온몸이 경직되었다. 이불속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집에 혼자 있던 어느 날 밤에도 나는 벽면에 붙어있던 그것과 마주쳤다.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건 오로지 눈동자뿐이었다. 새까만 그것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나의 증오심을 느꼈는지 그것은 벽지 뒤로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여전히 나를 둘러싼 세계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면서 점점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정말 싫었다. 절망스러웠다.


왜 그런 쓰레기 같은 집에서, 쓰레기 같은 것들을 버리지도 않아서, 살림을 그따위로 해서, 그런 끔찍한 것들이 살게 해서, 어린 나를 그런 공포심에 몰아넣었는지.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가난해도 깔끔하게 살 수는 있었다. 가난하면 오히려 살림이 소박해야 하는데, 언제 필요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어디선가 받아오고 주워온 것들은 정리되지 못한 채 쌓여있기만 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좋은 걸 사달라 한 게 아니었다. 필요 없는 걸 버리자고 한 것이었다. 자꾸만 받아오고 주워오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우리의 호소를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전세 기간이 만료되어 이사를 가야 할 때마다 쓰레기 같은 잔짐을 까만 봉지에, 파란 봉지에 이고 지고 다녔다.


이삿짐센터 아저씨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가 봐도 버려야 할 쓰레기들을 붙잡고 버리지 못하게 고집 피우는 엄마와, 처음 보는 아저씨들 앞에서 싸우기도 여러 번이었다. 언니와 나, 아빠까지 세 명이서 몰아붙여도 엄마의 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엄마는 고집이 셌으나 특히 물건을 버리는 부분에서는 유난히 고집을 피웠다. 그럴 땐 평소와 다른 표정과, 지나치게 방어적이면서도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기능도 온전치 못하고 사용하지도 않는 쓰레기 같은 물건들을 버리자는 것뿐인데, 엄마는 마치 자기를 내다 버리는 것처럼 절망스러워했다. 실신하듯 소리치는 엄마를 보며 우리는 적잖이 놀랐고 이유 모를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쓰레기 같은 짐들을 정리하는 방식도 그녀만의 것이었기에, 짐을 옮긴 후에는 나도 이삿짐 아저씨들처럼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항복을 얻어낸 대가로 짐 더미에 홀로 앉아있던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것은 무엇을 지켜낸 승리자의 표정이 아니었다. 단순히 이사라는 행사를 치르고 나서 지친 표정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지켜냈으나 본인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어, 쓰레기 더미 속에서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엄마는 (훗날 명칭을 알게 된, 저장강박증이라는)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 보였으나 우리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먹고살기도 힘든 마당에 엄마에게 치료를 권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당장에 누구를 죽이니 살리니 하는 증상은 아니었기 때문에 치료를 위한 비용도 우리에겐 사치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녀를 설득하는 일은 소 귀에 경 읽기 그 자체였다. 그녀는 어떤 면에선 소통이 전혀 불가한 존재였다. 그녀는 우리의 부탁과 호소와 짜증에도 늘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전봇대 같았다. 망부석이 아닌 이유는, 포기 않고 몰아붙이는 우리의 요구에 그녀 역시 한계에 다다를 땐 '번쩍'하는 전기를 내뿜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두가 아팠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우리는 한바탕 진이 빠지고 말았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자는 게 아니라 이미 곳곳에 피어오른 곰팡이를 제거하자는 의지였다. 다시는 탕이 나지 않게 물건을 버리고 환기를 시킬 공간을 마련하자는 제안이었다. 어린 소녀들은 이렇게 제법 자란 뒤에도 문제해결력은커녕 판단력조차 상실해 버린 성인 어른을 다룰 방식을 알지 못했다. 언제나 열쇠를 쥐고 있는 건 엄마였기 때문이다. 조금씩 몰래 내다 버려도 늘 주워올 것이 없나 동네 쓰레기 구역을 순찰하는 그녀의 레이더망에 걸리기 일쑤였다. 처키의 인형도 아니고 다시 그 물건이 떡하니 들어와 있는 것을 볼 때의 공포와 절망감이란. 어쩌면 청년기까지 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무기력증은 이러한 부분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대신 우리의 짜증과 반항은 점점 거세졌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아무 말없이 앉아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면 답답함에 짜증과 화가 치밀어 오르다가도, 마치 자식이 엄마를 잡아먹을 듯이 공격하는 모양새를 보고선 마음이 아파 그만두기 일쑤였다. 그 시절 나의 언니는 세상 독한 말로 온갖 짜증 섞인 화를 내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일이 잦았고, 나는 그 장면을 지켜보며 감정을 삭이는 편을 선택했다. 나에 비해 언니의 감정표현이 더 세기도 했고, 그걸 견디고 있는 엄마의 속도 말이 아닐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대화 방식이었다. 삶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어서 대화를 시도했는데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우리가 실패한 건 삶일까 대화일까.




그 시절엔 이사 간다는 게 더 좋은 집으로 가는 것인 줄 알고 좋다고 따라나섰다. 그저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전셋집을 전전하는 것뿐이었다. 실상 전재산에 해당되는 전세 보증금은 몇 년이 지나도 불어나지 않았다. 비슷비슷한 모양의 집에 들어가 살았다. 엄마는 와중에 창고가 있는 방을 선호했다. 온 가족의 눈총을 피해 안심하고 쓰레기들을 쌓아놓을 수 있는 곳이었다. 물론 폐품들은 그 방에만 모여있지 않았다. 발 디딜 곳만 남겨두고 사방에 차이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적나라한 그녀의 상태를 마주하는 과정이 그녀도 힘겨웠는지 이사할 때마다 그녀의 기도제목은 한결같았다. 그 집에서 오래 사는 것. 전세 계약이 연장되길 바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집주인도 집까지 쓰레기로 만들어버리는 그녀의 능력을 반기지 않았다.  쫓겨나듯 이사를 하면서도 나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환경미화 차원의 현실을 바꿀 의지도, 누군가와 소통할 마음도 없으면서 매번 기도하라는 말에 나는 넌더리가 났다. 엄마는 하나님과도 일방적인 소통만을 시도하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 가족을 거리에 나앉게 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내가 결혼하기 직전에 옮겼던 집에서는 위기가 있었다. 이미 분가한 상태에서 집주인으로부터 받았던 전화를 잊지 못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호소를 넘어서 고소할 태세였다. 내가 떠나면 두  살 곳이라 신경이 쓰였기에, 조금 더 깔끔한 집으로 알아보던 중 눈에 띄었던 곳이다. 어쩌면 남편을 인사드리러 데려가거나, 결혼 후에도 방문할 것을 염두에 두기도 했던 것 같다. 집은 좁았으나 방이 두 개에 싱크대나 욕실까지도 모두 수리된 상태였고, 짐을 줄이고 산다면 충분히 두 분이서 지낼만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우리 짐도 다 버리고 깔끔하게 살란 말에 부모님도 동의했고, 들어가기 전 깨끗한 집을 보니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다만 월세를 세게 요구하는 집주인에게 사정하여 보증금을 좀 더 올려주고 월세를 깎는 방향으로 계약을 성사시켰다. 수입이 없던 부모님을 생각해서 월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훗날 엄마에게 듣기로 집주인은 부모님을 생각하는 딸을 칭찬하며, 내가 결혼한다는  부조금까지 챙겨주었다고 했다. 그런 집주인이 약 2년 뒤, 내 부모님을 고소하겠다며 시집간 딸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 호소를 한 것이다. 집주인과 엄마는 이미 몇 차례 감정싸움을 한 모양이었다. 공유하고 있는 앞마당에까지 폐지를 비롯한 쓰레기들이 자리를 하고 있으니, 지날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졌으리라. 그녀가 꾸린 공간들은 흡사 고물상을 연상케 했다. 어떤 고물상은 그보다도 깨끗했다. 베테랑 고물상엔 적어도 질서가 있었다. 그러나 엄마의 마당엔 질서도 근본도 없었다.


처음엔 폐지로 시작했다가 취급하는 범위가 점점 확장되었다. 나중에는 급기야 쓰레기봉투까지 주워왔다. 남이 봉해서 버린 쓰레기 종량제 봉투에 공간이 남아서 아깝다는 거였다. 그런데 남은 공간에 쓰레기를 추가해 내다 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속에 있는 것을 손수 꺼내어 하나로 합치고 나머지 하나는 씻어서 말려두기까지 했다. 학교에 갔다 돌아오면 엄마는 가끔씩 그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 나는 숨을 참은 채 얼른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도 너저분하기로는 다를 바가 없었다. 몇 년째 억지로 적응하며 살아온 공간일 뿐이다. 그러나 현관 바깥 좁은 공간에서 나는 냄새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작업이 끝나도, 쓰레기봉투를 씻어서 널어두어도 한동안 그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역한 냄새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숨을 참고 지나치다가 이제는 영영 벗어나버린 그녀의 집에서, 그녀는 여전히 자기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곧 치우겠다면서도 변하지 않는 풍경에 집주인이 질렸을 만도 했다. 나는 포기하고 살 수밖에 없는 그 집안의 약자였지만 집주인은 어디 가당키나 한가. 이 와중에 가재는 게 편이라고 아빠마저도 엄마 편을 들었다니 부모님은 상황 파악을 못해도 한참 못하고 있었다. 집주인이 내 집에서 당장 나가라며 내쫓아도 부모님은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2년 전 입주를 위해 계약조건을 바꿔달라며 사정했던 나는 더더욱 할 말이 없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집주인은 당신 엄마에게 정신병이 있는 게 분명하니 제발 좀 설득해 달라고 말했다. 전세계약 기간이 끝났으니 집주인이 퇴거를 명령해도 부모님은 시기가 애매하니 자동 계약연장되었다는 논리로 맞섰다. 자기가 말해봐야 소용이 없고 감정싸움밖에 되지 않으니 자녀인 내가 중간에 다리 역할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나는 책임감을 느꼈다. 그렇지. 내가 이 집에 입주하도록 다리를 놓았으니 다시 나오게 하는 일도 해야만 했다. 이후 엄마와 통화를 할 때에 나는 거의 이성을 잃었던 것 같지만, 이후 몇 번이나 집주인의 전화에 시달려야만 했다. 당시 한겨울이라서 우선 이사 갈 집을 알아본 다음 이듬해 봄에 나가기로 합의를 하고서야 사건은 일단락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에도 엄마가 정말 거리에 나앉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하는 못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토록 꺾을 수 없는 고집이라니. 이것은 고집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한 무서운 병이 틀림없었다. 그깟 쓰레기들이 뭐라고. 내가 암만 무시하고 경멸해도, 그 견고한 쓰레기 성을 나는 끝내 무너뜨릴 수 없을 거라는 무력감에 나는 또다시 휩싸였다.


《내가 듣고 싶던 말, 네게 하고 싶은 말》


"우리가 함께 사는 날은 영원하지 않단다. 네가 엄마를 떠나 살게 되었을 때, 엄마는 너를 걱정하지 않고 너 또한 엄마를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각자 어디에서 살든 그곳을 잘 가꾸며 살자."


* 사진 출처: Pixabay, Pere Serr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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