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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May 15. 2024

손병호 게임

접으라고 해서 접긴 접었는데


"돈이 어디 있어서 그걸 하니..."


사실 애초에 선택지는 없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 어머니는 늘 저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지원을 바라지 않았고 지지를 원했다. 아무리 가난한 부모라도 자식은 믿어줄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사랑했지만 나를 믿진 않았다. 돈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거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는 나보다도 돈을 믿었다.

아버지 말처럼 '아버지를 닮아' 야무지지 못했던 나는 나를 믿기 어려웠고, 나를 닮은 아버지 외에 나를 믿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꿈이나 소망 등을 이야기할 때 늘 걱정 어린 눈빛과 말을 보탰다. 항상 똑같이 돌아오는 어머니의 대답은 내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나는 더 이상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나 자신에게도 묻지 않았으며, 묻기도 전에 대답했다. 돈이 어디 있어서 그걸 하느냐고.

중학교 3학년,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서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어머니는 난색을 표했다. 우리 형편에 무슨 대학이냐며, 실업계 고교에 가서 얼른 취직하길 권했다. 당시에는 거의 모두가 대학에 진학하는 분위기였음에도, 어머니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본인이 학업을 포기했던 그때 그 시절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데, 대학이 전부는 아니라지만 겨우 일반 고등학교 진학을 희망하는 자녀의 인생을 끌어내리려는 부모라니. 회의감이 들었다.

심지어 당시 나는 반 2등, 전교 7등을 했을 만큼 공부도 그럭저럭 잘했다. 평이 좋은 일반고에서 내 이름을 프린트하여, 자기 학교로 지원해 주길 바란다는 팸플릿을 보내오기도 했다. 아마도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을 만한 본교 출신의 인재를 미리 영입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내가 좋은 성적을 받을 때마다 자랑스러워했던 모습은 뭐였단 말인가. 잘했다고는 하지만 나에게 미래를 기대할 정도는 아니었던 건가. 역시 나를 못 믿고 있었던 건가. 그간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라며 뒷짐 지고 있었던 건 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방관이었단 걸 알게 되었다. 아니 적어도 거기까지에 대한 믿음이었다고 믿고 싶다.

  
다행히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언니가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며 어머니를 말려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일반고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일반고에 들어가서 수많은 '선택지'를 보았다. 전국의 대학교와 과를 나열해 놓은 정보였다. 깨알 같은 글씨의 벽보가 붙은 그 벽면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봐도 가고 싶은 과를 찾지 못했다. 다만 자꾸만 눈길이 머물렀던 과 이름은 지금도 생각난다.


 '문예창작과'


그러나 이것도 이내 나의 선택지에서 제외되었다. 일전에 넌지시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돈 못 버는 일'이라며 손사래를 쳤기 때문이다. 돈 못 버는 과는 접어.라고 누군가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선택지를 더 넓힐 수 있었던 유일한 첫 번째 관문을 나는 통과하지 못했다. 대학입시에 실패했다기보다는 고등학교 시절 내내 방황했던 것 같다. 태도는 모범생이었는데 머릿속으로는 늘 딴생각을 했다. 그 시절 진로고민은 누구에게나 절박했겠지만, 선택지가 얼마 없는 나로서는 극강의 효율성이 절실했다. 전국 어디에도 내가 갈 곳은 없었다. 정확히는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취직이 잘된다는 과는 가고 싶지 않았다. 국문학과로 타협하려는 마음도 내키질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국문학과를 나와서 국어선생님이 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내가 거쳐왔던 국어선생님들은 매력적이지 않았다. 어차피 문학을 할 거라면 그저 막연히 외국문학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넓은 외국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나를 인도해 줄 구심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대학은 결국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입학했다. 당시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도, 대출신청 시 보호자로 동행한 엄마는 학자금에 생활비를 추가로 대출해 달라고 했다. 보통 첫 학기 등록금은 부모님이 내준다는데, 학자금으로 시작하는 것도 모자라 내 이름으로 일으킨 대출에 생활비까지 얹어야 하다니. 우리 집에 정말 돈이 없긴 없구나, 실망을 넘어선 좌절감이 들었다.


부모님은 나를 딱 19살까지만 키우려고 했었나 보다. 대학진학을 반대한 어머니가 이해도 되었다. 나도 딱히 제가 꼭 해내겠습니다!라는 패기 넘치는 자식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펼쳐 보인 선택지 안에서 순순히 선택하는 자식도 아니었다. 손병호 게임처럼 접으라고 해서 접긴 접는데 굳이 가운데 손가락만 남겨놓고 접는 타입이랄까.


돈이 없으면 무엇을 못한다고 여겼던, 나의 가능성보다도 돈을 믿었던 어머니가 애달프다. 돈이 있었다면 휴직계를 더 길게 낼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워하는 나도 그녀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뿌리 깊은 생각에 이제는 굴복하고 싶지 않다. 평생을 걸쳐 내 안에 심긴 그 생각을 뿌리째 뽑을 엄두는 안 나지만, 옆의 텃밭에는 새로이 다른 생명을 심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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