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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May 26. 2024

꿈과 책과 힘과 벽


잔나비의 음악, 최정훈을 좋아한다. 팬이라고 하기엔 앨범 한 장 안 사봐서 민망하지만, 팬이다. 2019년에 발매된 앨범의 수록곡을 지금에서야 듣게 되었지만, 팬이다. 음악을 잘 듣지 않는 내가 어딜 가면 잔나비의 음악을 요청한다. 그렇게 나의 순간순간에 잔나비를 초청한다.


그러다가 또, 잔나비가 내게 들려왔다. 작년에 자주 들었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노래가 흘러나왔다. 카페의 열린 창문 사이로 시원하고도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주문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코로 마시는 기분. 턱을 괴고 감상에 젖었다. 이제 곧 여름이 오겠구나. 아 지금 날씨가 딱 좋은데. 여름의 땡볕과 습도, 지긋지긋한 여름과 그 끝을 생각하니 심난했다. 뜨거운 여름날이 한 풀 꺾이면 한 해도 거의 저물어가겠지. 그래도 또다시 찾아올 누군갈 위해서 남겨둘 마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익숙한 잔나비의 감성과 최정훈의 목소리, 그러나 처음 들어보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귀를 기울였다. 첫 소절부터 가사가 범상치 않다. 아, 역시 좋아.



<꿈과 책과 힘과 벽, 잔나비, 2019>


해가 뜨고 다시 지는 것에

연연하였던 나의 작은방
텅 빈 마음 노랠 불러봤자

누군가에겐 소음일 테니
꼭 다문 입 그 새로 삐져나온

보잘것없는 나의 한숨에

나 들으라고 내쉰 숨이더냐
아버지 내게 물으시고

제 발 저려 난 답할 수 없었네
우리는 우리는 어째서 어른이 된 걸까
하루하루가 참 무거운 짐이야

더는 못 갈 거야


꿈과 책과 힘과 벽 사이를

눈치 보기에 바쁜 나날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무책임한 격언 따위에
저 바다를 호령하는 거야

어처구니없던 나의 어린 꿈
가질 수 없음을 알게 되던 날
두드러기처럼 돋은 심술이

끝내 그 이름 더럽히고 말았네
우리는 우리는 어째서 어른이 된 걸까
하루하루가 참 무거운 짐이야

더는 못 간대도


멈춰 선 남겨진 날 보면 어떤 맘이 들까
하루하루가 참 무서운 밤인 걸

잘도 버티는 넌
하루하루가 참 무서운 밤인 걸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루는 더 어른이 될 테니
무덤덤한 그 눈빛을 기억해
어릴 적 본 그들의 눈을
우린 조금씩 닮아야 할 거야




한 편의 시 같기도 한 노래의 제목. 꿈과 책과 힘과 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가사를 듣다 보니 어렴풋하게 알 것도 같았다.


어른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정의할 순 없지만 어른이 되어보니 알 것도 같은 것처럼.


무엇보다도 내가 저 노래에 위로를 받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아, 나는 어른이구나. 그런데 아직 무덤덤한 눈빛을 닮아가고 있는 어른일까, 아님 그런 눈빛을 보내고 있는 어른일까.


이 노래의 가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이로 돌아가고 싶다.


라고 한 어느 댓글에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감을 했다.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아도 이해가 되는 글과 사건들이 있다. 지나온 경험과 그 속에서 느낄 수밖에 없었던 감정들이 있다. 이 노래가 이해된다는 것은 내가 그 과정들을 지나고 있거나 지나왔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한 편으로는 잘 지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노래의 가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느 나이로 돌아간다고 해도, 언젠가는 그 시간을 지나야 할 것이다. 현실의 벽 앞에 멈춰 선 채 남겨진 나의 모습을 지켜보는 시간을. 날개가 없는 인간이 두 발로 걷다 보면 현실의 벽을 평생 만나지 않는 삶이란 없을 테니.


그렇다고 해서 멈춰있는 시간이 끝난 시간은 아니잖은가. 누군가는 그 시간을 견뎌내지 못한 채 끝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시간을 견뎌낼 것이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서, 혹시 어디서 길을 잘못 들었나 하며 뒤돌아서는 용기를 내볼 수도 있다. 그러다가 새로운 길을 찾을 수도 있겠지. 그러다 또 벽을 만날 수도 있다. 그렇게 평생 헤매다가 죽을지언정 그 인생의 눈빛은 쓸쓸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무덤덤한 그 눈빛을 아는 인생. 그러면서도 그 눈빛에 별빛 하나 담아낸 인생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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