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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Jul 18. 2024

죽은 자들과 함께 식사하기

시간의 대역폭을 확장하는 일


원제목이 <Breaking Bread with The Dead>라는 책의 번역서를 읽고 있다. 여기서 죽은 자는 우리보다 앞선 시대에 살았던 선조들을 의미한다. 그들이 남긴 글을 읽는 행위가 시간의 대역폭을 확장하는 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인격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일시적인 순간에서 빠져나와 더 큰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순간의 중력을 극복하는 일, 현재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이탈 속도를 확보하는 일은 엄청난 투쟁이다. (45p)


이 책에서 소개된 얼리사 밴스의 구분법은 일류 대학의 입학 사정관들이나 하는, 탈락자 명단에 올라갈 지원자의 결점을 찾아내는 부정적 선택과 장점을 중시하는 긍정적 선택으로 나뉜다. 과거 내가 했던 '부정적 선택'이 생각났다. 바로 옛 선조들의 글을 읽으며 그들과의 식사 자리를 박차고 나왔던 '쉬운 선택'이다.


스무 살, 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파스칼의 팡세를 꺼내 들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던 유명한 철학자의 생각이 궁금했다.(Pensée는 생각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다.) 줄거리를 파악해야 하는 소설이거나 함축적 시도 아닌, 파스칼의 단편적인 생각들을 모아둔 책이었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종류인 에세이에 가까웠다. 그러나 들여다본 그의 머릿속에서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어느 부분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당시의 나와는 현저하게 다른 생각과 주장을 하는 파스칼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황급히 그 책을 덮어버림으로써 그와의 식사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것은 차라리 쉬운 선택이었다.

죽은 이들과 식사하는 이 과제의 진정한 도전, 또는 진정한 기회는 그들이 우리를 기겁하게 만드는 말을 꺼내는 순간, 역겨움과 공포에 질려 이 과제를 그만두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할 정도로 놀라게 하는 그 순간에 찾아온다. (57p)


어쩌면 그 이후로도 계속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이 선택을 해왔던 것 같다. 아예 고전을 들춰보지 않음으로써, 죽은 자와의 식사 자리에 얼씬도 하지 않음으로써. 저자인 앨런 제이콥스는 정보 과부하와 사회적 가속화의 영향을 받는 상황에서는 자연히 부정적 선택 쪽으로 기울게 된다고 말했다. 그것이 선택자로서의 우리의 삶을 훨씬 더 쉽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콧 알렉산더는 밴스의 구분법을 과거 인물들을 평가하는 데 적용한다면 큰 손실을 가져온다고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반유대주의를 문제 삼아 이디스 워튼을 거부하게 될 것이고, 인종주의를 빌미로 데이비드 흄을 거부하게 될 것이며, 성차별주의를 명목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거부할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후보자들의 수가 계속해서 줄어들면서, 이 과정에서 뛰어난 인물들마저 벌레 취급하고 말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후보자들의 범위가 점점 더 좁혀져 그 폭이 지나치게 좁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 범위 내에 있는 작가나 책들은 분명 사고의 폭에 있어서도 그만큼 협소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손쉽게 관리할 수 있고 내용상으로도 별 차이가 나지 않는 개념들의 꾸러미만 손에 쥐게 된다. (86-87p)


그러니까 나와 동시대에 살면서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생각의 결이 같은 사람의 글만 읽으면서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만을 찾아가는 독서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동시대에서도 정치적 성향이나 사회적 입장의 다름을 인정하는 독서를 지향한다면 사고의 범위는 넓어지겠지만, 시간의 대역폭을 확장하는 일은 인격의 밀도를 높여준다. 또한 '시간의 손길'을 거친 글들은 오히려 갈등요소가 현재의 갈등으로 귀결되지 않을 수 있다. 죽은 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는 논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내가 그것을 그때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비록 그들의 사상과 철학이 오늘날에는 구시대적 관습으로 보일지라도, 내가 태어나 자라온 시대의 인습으로 폄하해서는 안될 일이다. 또한 현재 내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근시안적인 자세로 그들 삶의 지혜를 끼워 맞추려 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그저 시간의 대역폭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지금 내가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을 바르게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현재에 급급한 선택을 내리지 않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주된 관심사를 반영하는 그런 요소들만 고려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것들은 사실 인간을 판단할 때 고려해야 할 유일한 것이 아니다. (중략) 교정시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종종 말하듯 그 누구도 자신이 한 최악의 행동에 의해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전체로 바라봐야 한다. (87-88p)


철학이나 사상을 논하지 않더라도, 어떤 가치관이나 생각의 결이 다른 사람들의 글은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인 에세이 특성상 글쓴이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과 그 배경, 그리고 그에 대해 느낀 점을 기술한 문장들을 통해 글쓴이의 가치관이나 특성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여전히 글을 읽을 때 '누가' 쓴 글인지가 중요하다. 어느 분야의 전문가나 권위자가 쓴 논문은 신뢰할 수 있듯, 내게는 마음에 새길 문장을 쓴 작가의 정체가 중요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작가들 중 내가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플랫폼인 브런치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내가 안다'라고 말할 수 없다. 글 하나로, 책 하나로 그 사람 전체를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오직 그가 사는 세계를 둘러볼 뿐이다.

"그런데 시간 여행을 하는 건 작가가 아닌 독자들입니다. 오래된 소설을 집어 들 때 우리는 그 소설가를 우리 세계로 데려오면서 그 사람이 이 세계에 속할 만큼 개화된 사람인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소설가의 세계로 여행을 가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입니다." (62p)


결국 다름을 인정하는 독서다. 가까이에서는 나와 다른 생각과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삶을 인정하는 것이고, 시간의 대역폭을 넓히는 과정에서는 나와 다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선택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 나의 생각이라 주장하는 것도 진정 내 것인지 모를 일이다. 생각보다 내 안의 많은 것들이 주변 사람들이 믿는 바를 단순히 믿는, 신념이라는 용어로 불릴 자격조차 없는, 견해라기보다는 차라리 주변 소음에 더 가까운, 배경에 항상 있지만 결코 인지되지 않는, 깊이 있는 성찰의 대상이 되지 않는 내면의 소음(81-82p) 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섣불리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죽은 자들과의 식사자리를 함부로 박차고 나오지 않을 것이다. 순간의 중력을 극복하고 시간의 대역폭을 확장하여, 밀도 높은 인격을 소유하고 싶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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