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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Jul 27. 2024

사랑에는 효율이 없다

받은 사랑을 기억하는 일


공부에는 왕도가 없고, 사랑에는 효율이 없다. 다만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더 주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있는 자가 사랑을 주는 사람이다. 사랑받은 자는 사랑 주는 마음을 생각하고 아쉬움에 사무치며 아파할 때 비로소 성장한다.


물건에는 기능을 기대하고, 음식에는 맛을 기대하고, 일에는 성과를 기대한다. 들인 돈에 대한 가성비와 기회비용을 생각한다. 사람도 고용시장에서는 인적자원으로 분류되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다.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은 사랑이다. 좋은 것을 받은 대상에게 바라는 것은 효율이 아니라 성장이다. 그렇다면 성장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어떤 크기여야 할까. 얼마큼 자라나야 성장한 걸까. 한 치일까, 한 뼘일까.


성장은 생명이다. 씨앗이 발아하여 대지 위로 움트기까지의 과정은 탄생의 영역이지만, 키가 자라나고 잎이 무성해지고 열매를 맺기까지 성장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해풍을 맞은 나무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굽어 자라더라도, 그것이 바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살아남았다는 생명의 증거다.


식물은 개체마다 고유의 크기와 모양이 있다. 돌매화나무가 메타세쿼이아만큼 자라지 않는다고, 강아지풀이 억새만큼 자라나지 않았다고 탓할 수 있겠는가. 또한 본래의 형질대로 발현되고 완전체로 자랐다면 성장이 멈추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가을에 열매와 잎을 다 떨궈낸 나무는 죽지 않았다. 앙상한 가지를 남긴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도 계절에 따라 반응하는 생명력을 가졌다. 그 안에 생명이 있는 한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위로 자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성장은 윗 방향으로만 자라는 것이 아니다. 성장은 다른 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고개만 돌려도, 아니 눈동자의 움직임만 달리 해도 볼 수 있는 대상이 달라진다. 내게서 거둬들인 시선을 타인에게로 향할 때, 나와 다른 존재의 움직임을 포착할 때, 그 움직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나무에 새가 깃들고 사람이 머문다. 우리는 하나의 풍경이 된다. 끊임없이 확장하는 자연의 일부가 된다. 그것은 받은 사랑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스스로 계획하지 않았던 영어캠프에 아이들을 합류시키고, 결혼 10주년을 기념하며 괌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방학 때마다 아이들을 영어캠프에 참여시킬 의향이 있다는 나의 또 다른 가족은, 최종 캠프 목적지로 캘리포니아를 꿈꾸고 있다고 했다.


캘리포니아, 어바인. 20대 초반이었던 시절 어떤 대가 없이 나를 그곳에 초대한 분이 계셨다. 그분의 가족은 내가 무비자로 체류하는 3개월 동안 머물 수 있는 방을 내어주셨고, 매일 식단을 구성하여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셨고, 서부 지역의 유명한 곳은 다 데려가주셨다. 모든 외식과 공연 비용을 지불해 주셨다. 그들은 나의 보호자였고 가족이었다.


그분은 당시 사랑을 제대로 받을 줄 몰랐던 나를 그곳에 초대하며, 내가 보면 좋을 것이 있다고 하셨다. 그분은 당시에도 다 큰 성인이었던 내게 '너는 잠재력이 있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분의 말씀대로 미국은 큰 세상이었다. 분명 좋은 경험이었다. 그분의 제안대로 미국 서부를 떠나 동부로 배낭여행을 했고, 그 과정에서 그분은 내게 여행 경비를 빌려주셨다. 갚아야 할 기한은 따로 없었으며, 이자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이라도 제대로 보고 온 것일까, 하는 의심이 들 만큼 나는 다녀와서 심한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겪었다. 다만 그분께 빌린 돈을 갚기 위해서 학교 수업은 빠져도 아르바이트는 빼지 못했다. 그것이 그 시절 나를 움직이게 했던 유일한 동력이었다. 그것은 책임감이었을까, 사랑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사랑이었을까.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어떤 이유로 이제는 그 분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 그러나 한 때의 인연으로 그 분과의 관계를 정리하기엔 내 안에 아직 그분이 주신 사랑의 거름이 남아있다. 캘리포니아라는 말만 들어도, 미국이라는 나라만 생각해도, 성장과 잠재력이라는 단어만 쓰더라도 나는 그분이 떠오른다. 성장은 인간의 본능이라고도 하지만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도 나는 여전히 나의 성장을 지향한다. 나를 믿어주신 유일한 어른이 보았던, 나의 잠재력이 무엇인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분이 내게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언어의 진보도, 세계적인 가치관도, 꿈과 열정도 품지 못했던 내게 그분은 실망을 하지 않았다. 가끔 쓴소리를 셨지만 그것에는 나를 향한 관심과 사랑이 있었다. 그분은 종종 장난 삼아 날더러 연구대상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내게 걸었던 그분의 기대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내가 그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분은 나를 관찰하며 자신이 기대한 방향을 수정해 갔다. 나에게 효율을 추구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잘 자라고 있는지 관심 있게 들여다볼 뿐이었다.


미국에서의 3개월을 마무리하고 복학했을 때, 잠시 귀국했던 그분과의 만남을 기억한다. 보고 싶은 마음과 숨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있었다. 그분께서 내게 선물한 시간으로 인해 나는 무엇이라도 근사한 삶의 결과를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우울증과 무기력증으로 힘든 마음을 내비쳤을 때, 나를 바라보던 그분의 눈빛은 나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더 주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사랑이었다.


나는 그분에게서 사랑을 배웠다. 이 사랑을 갚을 수 있을까. 그분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직접 갚지는 못하더라도, 누구에게라도 이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 아직 해내지 못한 인생의 숙제다. 사실 나는 그전에 내 삶에서 열매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효율에 기반한 생각이었다. 그분이 내게 주신 것은 사랑이었다. 사랑은 효율이 아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영어캠프에 참여시킨 나는, 아이들에게 성장을 바란다. 그것은 영어실력의 향상이 아니고 다른 면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이다. 전략적이지 못한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애초부터 전략과 계획을 세우지 못한 채 내린 결정이었다. 어쩌면 그저 지금의 나를 위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욱 비효율적인 선택일 것이다. 괜찮다. 사랑에는 효율이 없으니까. 그저 들인 노력만 있을 뿐이다. 그것이 시간이든 돈이든, 사랑하는 대상에 들인 노력은 사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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