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회기는 상담자와 내담자 각자의 사정으로 3주 만에 만났다. 그동안 세리씨의 삶이 감당할 만했기를 바랐다. 내담자의 변화는 ‘회기’가 아니라 ‘회기와 회기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말이 있다. 3주라는 시간 동안 그녀에게 일어났을 변화가 궁금했다. 호기심이라기보다는 기대에 가까웠다. 세리씨는 그런 기대를 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있으면 명치 쪽에 긴장감을 느끼고 복통에, 과민성 대장 증상까지 이어진다는 자신의 신체감각 패턴의 이야기로 시작했다. 거의 매번 회기 시작이 그런 식이기는 했지만 이번 회기는 달랐다. 14회기와 15회기 사이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특히 그녀가 “그렇게 심한 폭력에 노출되었다면 누구든 어쩔 수 없지 않았겠냐?”라고 말하는 순간이 그랬다. 이번 회기는 ‘폭력에 대한 분노의 자각'과 ‘터치를 통한 에너지 방출’로 나눌 수 있다. 이번 업로드에서는 폭력에 대한 분노의 자각을 싣는다.
오랜만에 만나는 회기의 시작은 보통 조절이 잘 된 채로 시작되지 않는다. 그녀는 앉자마자 말을 쏟아냈다. 나는 조절하며 말하기를 꾸준히 말로 눈으로 몸짓으로 제안한다.
내담자: (의자에 앉자마자) 기도원이라도 가야 하나 막 이랬어요. 교회에 일정이 있어서 앉아 있다가 점심 먹자고 해서 더 있는데, 배가 많이 아프더니 미친 듯이 배가 아프더니, 나중에는 혈변까지 보더라구요. 그래서 힘들었는데. (매우 빠른 속도로 말을 함)
상담자: 알았어요. 우리 조금 10초만....숨 돌릴까요? 우리 충분히 얘기할 시간 있으니까.
내담자: (숨을 고른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안정화 기법을 스스로 해 본다. 나랑 눈 맞추고 멋쩍은 듯 눈인사를 함)
상담자: 네 맞아요. 우리 오랜만이에요... 인사도 해요,
내담자: 화요일에... 상담 생각하면서 쓰던 것들이 있어요.
상담자: 저 보여주실 거예요?
내담자: 그냥 읽어드릴게요. 이번 주 초까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어요. 스토커 사건 관련해서 관련 추가 진술서를 내야 했는데, 몸이 안 좋아서 계속 못 쓰고 미루다가 미룰 수 없어서, 월요일 낮부터 화요일 새벽까지 써서 완성했는데 다 쓰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눈물이 왈칵 쏟아짐)
상담자: 그래도 우리 거기 잠깐 있을게요. 천천히 말해 볼게요. 조금씩 속도를 줄여볼게요.
내담자: (말 속도를 줄이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음. 중간중간 호흡을 하려고 함). (적어놓은 것을 읽으면서) 이렇게 많이 맞고 짓밟히고 살았는데... 지금 내가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안정을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으로 제가 이해가 되었어요. 그동안 잘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 들리 이해가 가더라고요. 그동안 나는 왜 이럴까? 왜 멀쩡하게 살지 못할까 스스로를 탓했는데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폭력과 가스라이팅에 노출되면 누구라도 이렇겠구나. 자기 삶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희망과 자신감을 가질 수가 없겠구나. 이번에 처음으로 폭력이 진짜 나쁜 거구나. 그동안은 그렇게 인식을 못했거든요. 왜냐하면 계속 그렇게 살았어야 되니까, 폭력은 정말 인격을 말살시키는 나쁜 거구나 처음으로 진심으로 와닿았어요. 그동안 계속 그렇게 노출된 상태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폭력이 그만큼 위험하고 나쁜 일이라고도 인지 못 했던 것 같아요. 폭력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냥 개구리가 불에 올린 냄비 안에서 서서히 뜨거운 줄도 모르고 익숙하게 있는 것처럼 제가 폭력이나 겁박이나 위해를 당해도 기분은 나쁘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쉽게 말해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 공격하거나 경계를 세우지 못했던 것 같아요.사실 이번에도 정말 갈등이 심했던 게, 그 사람들이 나에게 유해를 가하는 데도 내가 그 사람들이 처벌받도록 하다가, 이 그 사람이 입을 손해를 더 염려하고 보호하려고 하는 마음으로 있고. 그러다가 내가 바라는 대로 나를 보호하지 못하고 그 해소되지 않은 에너지와 공격성이 나를 향하게 돼서 몸이 더 아팠던 것 같아요.
상담자: 네. 지금 저도 지금 들으면서 제 마음속에서도 무언가 일어나고 있구나 싶어요. 일단 거기까지 이야기하시면서. 천천히... 내 안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조금 더 집중해 보면 좋겠어요.
내담자: 그냥 여기까지 쓰고... 그리고 추가 진술서를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서 새벽 5시까지 썼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오른팔을 크게 휘두르면서)
상담자: 그래요. (오른팔을 따라 휘두르면서) 그렇게 나름 공격을 하는 행위였을 것 같아요.
내담자: 제가 그 사람들이 나쁜 그런 거를 까발리고 처벌하기 위해서 추가 진술서를 쓰고.
상담자: 그 사람들...
내담자: 어릴 때부터 그 사람들한테, 그냥 계속 왕따 당하고 폭행당하고.
이 시점에서 상담자는 내담자가 ‘그 사람들’한테 왕따 당하고 폭행당했던 시절로 가도록 안내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때 그 순간으로 바로가기보다는 그녀의 신경계가 지금 경험하기 시작하는 승리의 순간에 좀 더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완료하지 못한 움직임을 완료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상담자: 다 썼더니 어때요? 다 쓴 것은?
내담자: 배가 더 안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약간 그 말이 생각이 났어요.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선생님이 말해줬던, 그 에너지가 (사용되지 못한) 안에 갇혀서, 우리 교통사고 작업할 때처럼 (그녀는 얼마 전 교통사고를 겪었고 응급처치를 위해 에너지를 방출하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 에너지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안에 갇힌다고 그랬어요. 그런 게 이제 계속 내 안에서 나를 이렇게 했던 것 같은데 (손으로 무언가를 때리는 시늉을 하면서) 진술서를 그냥 쓴 것만으로도 뭔가 그 에너지를 좀 꺼낸 것 같아요.
상담자: 혹시 지금 얘기하면서 그것을 몸 안에서 느낄 수 있을까요? 조금이라도 뭔가 안에서 바깥으로 나온 느낌.
내담자: 그냥, 그냥, 막 엄청 아프거나 이러진 않았는데 그냥 좀 쓰해요. 그리고 지금 양발이 이렇게 꼬물꼬물.
상담자: 그래요. 여기 잠깐 있어 볼게요. 한 30초 정도 잠깐 있어 볼게요. 내 몸에 좀 시간을 줄게요.
내담자: (약 1분 후) 그러고 보면서 배가 덜 딱딱하더라고요. 맞아요. 배가 덜 딱딱했어요. 지금도 느껴져요. 아직도 설사기가 있기는 한데 보통 못 견디겠고 그런 식이기 때문에.
상담자: 추가 진술서는 언제 쓰셨죠?
내담자: 화요일. 그런데 짜증 나는 게. 그전에 이제 기피 신청을 해 가지고 수사관을 바꿔달라고 했잖아요. 왜냐면 그 사람이 스토커를 먼저 만나 가지고, 스토커 말이 너무 믿고 스토커한테 유리하게 질문하고 결론 지어버리고 스토커가 미안한 척하고 하면 이제 거기에 넘어가고, 제가 너무 속이 뒤집어서 계속 아파서, 대상포진도 생기고.
상담자: 아픈 지 오래되었죠. 많이 아팠고. 그리고 진술서 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내담자: 네. 힘든 것을 보기 싫었나 봐요. 그러니까 계속 미루게 되더라고요. 몸은 계속 아프고 좀 그래도 이게 그래도 해야 하니까 이렇게 정신 차려서 하려고 이제 했는데 몸이 계속 아프니까...
상담자: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됐어요?
내담자: 정신 차려서 하려고 하는데, 계속 골골대고 아무것도 못 했으니까.
상담자: 지금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내담자: 머릿속에만 있는 거죠. 아픈 게 좀 줄어들면 힘들어도 그걸 봐야지 써야지. 고통스러운 것을 써야 되는 건데 몸이 너무 아프니까 그것을 할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몸이라도 그냥 안 아프면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만 받고 그냥 어떻게 하든 쓸 텐데?
상담자: 몸 안에 남아 있는 고통이 있다면 어디쯤에 있을까요?
고통과 같은 부정적인 감각에 대한 질문은 강렬하고 효과적인 작업을 하는 문을 열기도 하지만, 그 고통으로 연상될 수 있는 전혀 다른 장면의 문을 열기도 한다. 이번에는 후자의 문이 열렸다.
내담자: 두통이요. (얼굴을 찌푸리며) 그런데 결론은 바뀐 담당 수사관이 한 번도 저한테 연락을 안 줬는데, 그냥 혐의없음으로 이제 종결이 난 것에요. 아니 혐의없음으로 해 가지고 결정 통지 문자를 보내는 거예요. 추가진술서 내기 전에 전화해서 진술서 내면 포함해서 결정한다고 했는데. 말하기를 지금까지 안 낸 거면 진술서 쓸 의사가 없는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제가 왜 물어보지도 않고 하냐니까 나 보고는 연락을 했냐? 이렇게 하면서 저한테... (몸이 떨리고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한다.)
상담자: 지금 몸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내담자: 모르겠어요. (눈썹이 심하게 움직이고 손이 많이 움직임) 그러면서 자기는 그런 의무가 없다 이러면서 제가 말 못 하게 어떤 정해진 멘트만 하는 거예요. 제 말은 들을 생각이 없는 거예요. 화딱지나게.
상담자: 손이 막 움직이네요.
내담자: 이제 또 있어요. 그래 가지고 그 수사관은 자기는 잘못한 것 없다는 식인데. 화요일에 추가 진술서내고 금요일에 혐의없음 판결이 났는데...
상담자: 네. 그래요. 지금 그 수사관 생각하면 몸의 느낌은 어때요?
내담자: 열받아요. 열받아요. 이쪽에서 열이 올라와요. (손으로 등 쪽을 가리킴)
상담자: 그거 좀 잠깐 두고 볼게요.
내담자: 그리고 (계속 수사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함)
상담자: 정말 짜증 났을 것 같은데... 혹시 몸에 에너지가 방향성이 있는지 잠깐 볼게요.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그 에너지 방향을 찾아보는 게 세리씨한테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잠깐만 우리 한 10초 정도만 있어 볼게요. 에너지 방향이 느껴지면 그 흐름을 따라볼게요. 지금 눈이 뭐라 그래요?
내담자: 눈은 모르겠고 좀 허리 일어나면 가슴이 펴지는 것 같아요. 눈은 잘 모르겠어요. (크게 뜬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상담자: 뭐라고 하는데요. 뭔가 너무 화나서 이러는 것 같은 (내담자 눈동자 움직임을 따라함) 열이 나나요?
내담자: 그래요. 뒤쪽으로 열나는 거 느껴져요.
상담자: 뒤쪽으로 열나는 것을 느끼면서 충분히 시간을 가질게요.
세리씨는 화가 났다. 그럴만하다.수사관의 잘잘못을 가리자는 것이 아니다. 수년간 이루어진 부당한 폭력에 대항하는 마음으로 몸 안에 온 힘을 집중해서 쓴 진술서가 스토커를 처벌하는데 쓰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큰 무력감을 느꼈을까.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옛날처럼 무력감에 쓸려나가지만은 않았다. 변화다. 치유가 일어나고 있다.
내담자: (침묵이 약 1분 정도 흐른 후) 음.... 그런데 솔직히 이거를 쓴 것만으로도 이제 스스로 써본 것만으로도 나에게 도움이 됐기 때문에 뭔가를 내가 했다... 그동안 벗어나지 못하던 것으로부터 나는 이거를 벗어나 있었구나를 느낄 수 있었어요. 그리고 패배 의식이 진짜 심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누군가가 나한테 해오면 이렇게 할 수 있어야 되는데 (손을 앞으로 쭈욱 밀어내듯이 뻗어내며) 그럼 나도 공격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되는데 이제 그게 안 되니까 계속 이렇게 되고 (몸을 웅크리며)
세리씨는 지난 회기에서 자신의 사적 영역을 넘어오는 것들을 대항하여 본인의 팔동작으로 밀어내는 연습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더 해야 하고, 과거에는 어떻게 했는지 본인의 몸을 이용해서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그 깨달음이 조금 더 선명해지기를 바랬다.
상담자: 이렇게 되는 게 뭐예요?
내담자: 내가 느끼는 분노로 나를 보호해야 하는데 나를 보호해야 하는 식으로 써야 하는 에너지를(손을 밖으로 밀어내며) 이렇게 향해 가지고(손을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가져오며) 삶에 힘이 없었거든요.
상담자: 추가진술서를 쓰면서 에너지가 혹시 좀 이렇게 됐어요? (내담자처럼 손을 밖으로 밀어내며)
내담자: 네 그러니까 쓰고 이제 이거를 그동안에 이렇게 갖고만 있었다면 누구한테 이렇게 보여주게 되는 거잖아
상담자: 좋아요. 그 느낌에 잠깐 머물러 볼게요. 어떤 느낌인지. 마음이나 몸의 느낌 모두.
내담자: 느낌이, 마음의 느낌이 그냥 통쾌하고 통쾌해요.
상담자: 여기 잠깐 머물러 볼게요. 한 10초 정도 머물러 보죠. 통쾌한 느낌.
내담자: 나는 왜 이렇게 멀쩡하게 못 살지! 제대로 일어난 것도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상담자: 그렇게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말들을 하면서 살았군요.
내담자: 그런데 이게 그 폭력이 진짜 나쁘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상담자: 어떤 계기로.
내담자: 추가 진술서를 쓰고 쓰고 나서 집에 가는 길에 이렇게 당하면 누구라도 자신감 있게 뭔가를 이뤄내고 뭔가를 하는 것이 어렵겠구나. 뭔가를 하려면 자신감도 필요하고 긍정적인 용기도 필요하고 힘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나는 척만 했지,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않는 척만 했지...이제서야 내가 정말 무서워하고 완전히 거기에 눌려 있었구나...
세리씨는 그동안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자신의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폭력의 피해자들에게 어려운 것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공포를 담아낼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을 통해서 가능하다. 나는 그 작업을 바로 이어 나갔다....
힐링 에세이 “조율 한 번 해 봅시다”는 트라우마 치료에 최적화된 소매틱 치료가 필요한 분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본 기록은 자신의 치료 과정을 공개하겠다는 내담자의 적극적인 제안과 결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내담자 세리씨(가명)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내담자를 식별할 수 있는 정보는 삭제하거나 변경하였음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