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밤, 마음을 밝히는 작은 불빛
기차 창문 너머로 유럽의 풍경이 흘러갑니다. 낯선 좌석에 앉은 젊은 미국인 남자와 프랑스인 여자. 우연한 시선의 교차, 책 한 권을 계기로 시작된 대화.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처럼, 첫사랑은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그들이 비엔나의 거리를 거닐며 나눈 대화들, 서로의 생각에 귀 기울이는 모습,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가까워지는 두 영혼의 거리. 우리의 첫사랑도 그와 같은 설렘으로 시작되지 않았나요?
어린 시절 추억을 모아 둔 상자를 열면 가끔 잊고 있던 보물들이 나타납니다. 색 바랜 편지, 언제였는지 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뚜렷한 형체로 남아 있는 말라버린 꽃 한 송이, 아직 걸음도 떼지 못했던 꼬꼬마 시절의 흑백사진. 그 추억들 속에서 첫사랑의 기억은 문득 찾아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고이 접어두었던 순간들이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하게 번져나갑니다.
첫사랑은 참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때의 나는 세상의 모든 색채가 처음으로 선명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마치 흑백영화가 컬러로 바뀌는 순간처럼, 평범했던 일상이 반짝이기 시작했지요. 창가에 내리는 빗물 한 방울,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까지도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존재가 나의 세계, 나의 우주를 완전히 바꿔놓는 순간이었으니까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 히스클리프는 "캐서린, 넌 내 영혼이야"라고 말합니다. 첫사랑의 순간에 우리는 이런 감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존재가 자신의 영혼과 맞닿아 있다는 이 신비로운 감각을.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이 황야의 바람처럼 거칠고 때로는 파괴적이었다 해도, 그 강렬함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우리도 한때 그런 열정을 품었던 적이 있으니까요.
클림트의 [키스]를 보면 황금빛으로 빛나는 연인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서로를 향해 완전히 기울어진 두 사람의 모습에서, 사랑의 온전한 몰입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그 순간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잊은 채, 오직 서로에게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첫사랑도 그랬습니다. 그 사람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온 세상이 달라졌던 시간.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한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 그 사람의 특정한 세부사항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첫사랑을 떠올릴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웃음소리, 걸음걸이, 혹은 책을 읽을 때 살짝 찡그리던 눈가의 주름까지 선명하게 기억하게 됩니다. 그 작은 세부사항들이 모여 우리 마음속에 특별한 한 사람의 초상화를 완성시키지요.
리스트의 [사랑의 꿈]은 어떤가요. 듣고 있으면 피아노 선율이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듯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느낌이 듭니다. 내 오랜 첫사랑의 기억도 그렇게 마음속에 잔잔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다가 격렬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지요. 처음 손을 잡았을 때의 떨림, 처음 이름을 불렀을 때의 설렘, 그리고 이별했을 때의 아픔까지. 그 모든 순간들이 음악 한 곡을 듣는 동안 스치다가 음악과 함께 조용히 마무리가 되지요.
심리학자 스턴버그는 사랑을 친밀감, 열정, 헌신의 삼각형으로 설명했습니다. 첫사랑에서 우리는 주로 열정의 불꽃을 강하게 느꼈을 겁니다. 그 불꽃은 시간이 지나면서 친밀감과 헌신으로 변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대로 사그라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이 우리에게 남긴 흔적입니다. 첫사랑은 단순한 경험 이상의 것으로,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 준 소중한 선물이었으니까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향한 첫사랑의 기억을 평생 안고 살아갑니다. 그에게 나오코는 젊은 날의 순수했던 감정, 그리고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첫사랑도 어쩌면 그런 존재가 아닐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순수했던 시간,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만났던 특별한 사람.
비포 선라이즈의 마지막에서 제시와 셀린은 9월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합니다. 기약 없는 재회의 약속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습니다. 우리의 첫사랑도 그렇게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는 마법 같은 시간이었죠. 비록 그 사랑이 영원하지 않았더라도, 그때 느꼈던 가능성의 감각은 여전히 내 안의 깊숙한 곳에 살아있습니다.
시인 네루다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라고 했습니다. 첫사랑의 순수함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조건도, 계산도 없이 그저 그 사람이기에 사랑했던 마음. 세월이 흘러 우리가 더 복잡한 관계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해도,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그 순수한 첫사랑의 기억이 살아 있으니까요.
첫사랑은 끝났지만, 그 경험과 감각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기에 가끔은 그 추억 속으로 돌아가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오래된 앨범을 펼쳐보듯 가만히 읽어 보는 그 시절 그 감정의 소중함을 새삼 생각 해보는 밤입니다. 그 추억 속에서 잊고 있던 내 모습을 발견하고, 사랑하고 있을 때의 내 모습을 돌아보며 미소도 지어 봅니다. 어쩌면 단 잠을 자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내일 밤 9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 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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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김인육, 사랑의 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