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시간을 함께 따로 보내는 사람들.
이 봄날,
그녀들은 도톰한 입술에
언제나 그랬듯 새빨간 립스틱을 바를 것이다.
나는 그녀들이 빨간 입술을 해 가지고
사람들 속에 아주 자연스럽게 섞여
농담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몇 번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들의 빨간 입술이
다른 여자들의 빨간 입술과는
매우 다르다고 느껴졌다.
핏빛 같기도 한 그 입술은
외로운 새벽을 홀로
수도 없이 견뎌낸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여인들의 것이었다.
명자 이모는 나의 시어머니의 오랜 친구이다.
그리고 천언니이모는 친정엄마의 친구이신데
엄마가 천언니천언니하고 부르니
나는 천언니이모라고 그녀를 부른다.
(참 이상한 호칭이지만 애칭이 되어버려서 바꿀 수 없다.)
두 분은 서로가 존재한다는 것 조차 알지 못하나
살다가 혹시 두 분이 만나게 된다면
분명 서로를 단박에 안고
꺼이꺼이 울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명자 이모와 천언니이모에게는 자녀가 둘씩 있고
둘 다 건전하고 건강하게 자라 서른 즈음이 되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릴 때에 남편들을 잃었다.
슬퍼할 겨를이 어디가 있어.
돈을 벌어야 했지. 뭐든 해서.
어린이집이 흔하지도 않았어.
어린것들 둘만 달랑 집에 두고 나왔지.
밖에서 문을 잠그고 말이야.
일이 끝나자마자 집에 돌아오면
방 불은 꺼져 있고 번쩍이는 텔레비전 불빛에
쟁반 쟁반 지들 둘이서 갖다 먹은 밥그릇들이 여기저기.
그 틈을 비집고 누워 두 애들은 잠들었고.
화장실 문은 불이 켜진 채로 열려있었어, 항상.
자기들도 무서우니까.
그럼 나는 거기 들어가 우는 거야.
그 화장실이 남편이었어.
유일하게 빛이 나고 문이 열려 있는 곳.
그게 우리 애들 아빠였잖아.
명자 이모와 천언니이모는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같은 이야기를 내게 했다.
명자 이모가 화장실에 들어가 꺼이꺼이 울 때
그 같은 시간,
또 다른 화장실에 기어들어가 꺽꺽 울던
천언니이모가 있었다는 것을
서로 알았다면 어땠을까.
나에겐
잠에서 깨는 9개월 작은 아이를 토닥이며
창가를 서성이는 새벽 그 시간이
하루 중 제일 외롭고 쓸쓸한 때이다.
언제 다시 잠들지 모르는 아기를 안고
오롯이 견뎌야 하는
외롭고 쓸쓸한 시간이 올 때마다
나는 명자 이모와 천언니이모를 생각한다.
새벽녘
다른 누군가는 화장실이 남편인 듯
컹컹 울부짖고 있을지 모르는 이 시간,
그 누군가의 인생은
이렇게도 쓸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들은 각자의 무게를 견뎌내며 인생을 산다.
때로는 그들의 울음소리를
듣기도 하고,
듣지 못하기도 하고,
또는 못 들은 척하기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