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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수지 May 08. 2023

멋진 어른 되기

멋진 어른 되기.


마트에서 한 어린이가 까치발을 들고 두부를 고른다. 한 손엔 엄마가 준 카드를 놓치지 않으려 단단히 붙잡고 키보다 조금 더 높은 진열장에 손가락을 최대한 편다. 그 순간 반경 십 미터 안 어른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 어린이를 바라본다. 개입하진 않으면서 속으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내라 어린이야!’ 저마다 각자의 응원을 보내는 눈빛. 드디어 의기양양 두부를 집어 든 아이의 뒷모습으로 마치 얼음 땡이 풀린 듯 모두 분주히 본인만의 두부들을 고르러 간다. 올라간 입꼬리는 숨기지 못한 채로.


우리 집 어린이가 아파 병원을 갔을 때 일이다. 소아과에서 울고 있는 어린 동생 어린이에게 꽤나 의젓하게 “주사 금방 끝나. 따~끔 하면 끝이야. 따~끔”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동공을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무엇이 이 어린이들이 연대를 맺고 서로 응원하게 되는지 궁금해진다. 눈앞으로 다가온 주사라는 고난 앞에서 자신보다 더 어린아이의 고난을 위로할 수 있는 힘 말이다.


어린이날이 101주년을 맞았다. 1923년 일제강점기의 한복판에서 발표된 <어린이 선언문>을 보면 어른에게 드리는 글 이 실려있다.


1.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보아 주시오.


1. 어린이를 늘 가까이 하사 자주 이야기를 하여 주시오.


1.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오.


1. 이발이나 목욕, 의복 같은 것을 때맞춰하도록 하여 주시오.


1.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1. 산보와 원족 같은 것을 가끔가끔 시켜 주시오.


1.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히 타일러 주시오.


1.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만한 놀이터나 기관 같은 것을 지어 주시오.


1.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 그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


언뜻 보면 이 선언문은 어린이들을 귀여워하고 챙겨주고 사랑해 줘야 한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그러나 이때의 어린이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사회의 가장 약자의 입장에서 전쟁과 일제의 치하를 겪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모든 폭력을 받아내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 당시 어른들은 어린이를 귀하게 바라보고 사람이 귀한 존재임을 알리기 위해 절박한 마음으로 이 선언문을 발표했을 것이다. 혹독하고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어린이가 미래>라는 원론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을 그 당시 나라의 지식인들과, 어른들이 지켜주었기에 그때의 어린이들이 어른이 되어 지금 내가 어른이 될 수 있었을 거다.


그로부터 백 년이 지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을 공공연하게 비난하고 힐난하고 거부하는 가.


‘애들은 시끄러워’


‘아이들은 귀찮아’


‘아이는 들어올 수 없는 노키즈존입니다’


‘난 아이 없는 딩크족이라 별 관심이 없어’


‘어린이 제한 속도 너무 늦은 거 아냐 에이’


우리는 어린이들의 어린이스러움을 과감히 거부한다. 소비자로서 권리를 주장하며 시민임을 포기한다. 개인의 선택을 사회와 분리하고 찬양한다. 그 사이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그 당시를 살아가는 어린이도, 모든 삶을 경험한 노인도 아닌 바로 우리 ‘어른이’다. 어떤 세대의 정체성을 거부하고 제한하면 나의 정체성도 제한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문을 활짝 여는 것과 같다. 물론 범죄와 윤리의 문에 안에선 어느 정도의 제한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린이는 제한의 대상인가? 어린이를 제한할 때는 위험할 경우뿐이다. 물론 어린이가 어떤 카페나 마트처럼 공공연한 장소에서 악다구니를 쓰며 울고 자지러진다면 공공의 장소의 성격에 따라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제제가 아니다. 말이다. 말은 위로의 성격을 띨 수도 있고 이해의 표현이 될 수도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우리는 알고 있다. 가장 힘든 사람은 부모도, 어른들도 아닌 그 어린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다들 조금은 참고, 인내하고 어린이가 안정이 될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는 사회 안에서 우리가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당혹스럽게도 나의 어린이 적 시절이 떠오른 건 위 문단을 쓸 때다. 태어났을 때부터 37살의 안수지로 살았을 것만 같은 나에게 매년 더 어린 내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나를 과거로 이끌어 7살 어느 언저리로 돌아간다. 그때 나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느 새벽, 김해의 작은 촌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강보에 싸인 100일 된 남동생과 부모님과 함께 도착한 집은 나이 많은 할머니가 주인으로 있는 집의 단칸 셋방이었다.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더 젊었고 아빠는 날마다 일을 하러 갔기에 주인집 할머니는 작은 셋방에 있는 내게 고구마도 찌어주고 옥수수며 계란이며 끼니때마다 챙겨주셨다. 비가 오면 아궁이에 불을 때고 솥뚜껑을 뒤집어 지짐을 구워줬고 엄마가 울고 있을 땐 오백 원을 쥐여주며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라 문밖으로 내 보냈다. 그 이후 어떻게 이사를 오게 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어린이의 슬픔을 먼저 눈치채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어른들이 내게 꽤 많이 스쳐 지나갔다는 것. 내 기억 속 별로 좋지 않던 어른들조차도 내게 나름대로 다정했고, 정스럽게 굴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마음이 뜨끈해진다.


아이들이 점점 줄어든다. 우리의 적극적이고, 에너지 넘치고, 사랑스럽고, 당당한 우리의 동료 시민들이 점점 줄어든다. 우리가 어린이를 대하는 무수한 방식들이 결국 미래가 우리를 대하는 무수한 방식의 얼굴이 되어 다가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땐 더 작고 세분화되고 연대가 약해진 우리의 어린이들이 ‘노어덜트존’으로 우리를 거부할 수도 있고 ‘노 휴먼 존’이 되어 사람의 모든 손길을 거부할 수도 있다. 서로가 서로를 거부하고 힐난하고 비난하는 사이 시민의 연대는 약해지고 가늘어질 것이다. 그런 사회는 전쟁보다 잔혹하고 외롭다. 아이의 땀이 흥건해진 이마, 흙이 툭툭 묻어 있는 무르팍, 가쁘게 숨이 차 벌게진 목덜미, 크게 벌린 입으로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외로움은 반감된다. 하물며 자연스레 바라보는 세계는 얼마나 생명력이 넘칠까.


모든 귀한 것은 존재할 땐 눈치채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값없이 누리는 모든 것이 값싼 것이 아님을 믿어야 한다. 어린이가 어린이스러울 수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어른의 축복이고 값을 매길 수 없다. 이 잔혹한 시대. 너무나 값싸게 어린이의 세계를 배제하는 건 아닐까?


내 주변의 어린이들에게 내가 어릴 때 좋아하던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마트에서 문을 잡아주고 먼저 자리를 양보해 주는 어른이 되자고. 어린이 제한 속도 도로에서 30킬로 보다 더 천천히 가 보자고. 아이들의 작은 실수나 말투 하나에 기분이 날카로워지지 말자고. 어린이들에게 말을 높여주고 식당에서 직원분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멋있는 어른이 되자고. 우리 집 어린이에게 양육자의 강압적인 태도로 가르치듯 말하지 않고 다정한 권위를 가진 어른이 되자고. 생각보다 이런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 생각보다 어린이는 빨리 자라니까.


어린이 선언문의 마지막 선언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 그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


우리의 어린이날은 5월 5일이 아니다. 모든 날이 어린이의 날이다.


김소영 << 어린이라는 세계 >>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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