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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May 11. 2020

민들레의 꽃말을 아니

2020년 5월 10-11일

날씨: 흐림

기록자: 동그라미


뽈이 작성한 리스트를 읽다 생각났다.

와! 사! 비!




뜬금없다.

런던에서 이것저것 많이 했는데 가장 먼저 떠올린 게 겨우 와사비Wasabi라니. 와사비는 런던 지하철역, 시내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시락 체인점이다.

내가 기억하는 건 킹스크로스 역 2층에 위치한 지점. 역사 1층에 있는 ‘해리포터가 9와 3/4 승강장으로 들어가는 비밀통로’ 컨셉의 포토존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직후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지하철 역 한쪽에는 아직까지 적지 않은 이들이 호그와트 기숙사 목도리를 두르고 벽에 붙어있는 절반짜리 캐리어를 끌듯 포즈하기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종각, 충정로 뭐 그런 역이려나(근거 없음). 긴 머리 백인 남자 직원이 몸을 흔들며 바람을 잡고 있었다. 내게 마법이란 해리가 지팡이 끝으로 발휘하는 힘이 아니라, 일상 공간에 기꺼이 환상을 심어두는 런던의 결정들일지도 모르겠다. 보통 관광지에서 사진 찍히는 것을 몹시 어색해하는 편이지만, 그날 뽈의 성화에 찍었던 사진은 두고두고 잘한 일이다. 그리핀도르 목도리를 휘날리며 마법사 지팡이를 든 나!

아무튼, 요깃거리를 찾다가 별 기대 없이 들어간 와사비는 한국의 밥순이, 밥돌이에게 가성비 좋은 점심을 선사했다. 런던에서 며칠간 비싼 외식을 하면서 쪼그라든 마음이 저렴한 가격에 쌀밥을 씹으며 기쁨을 되찾았다. 꽤 적절한 양념치킨의 소스 맛. 편의점 실외 테이블에 자리 잡은 듯한 어떤 익숙함이 맴돌았다. 셋이서 역사를 드나드는 이들의 머릿통을 내려다보며 밥을 먹었다. 도시락 하나로 격조 있고 비싸고 근사한 세계와 저렴하고 간편하고 결국 내 입맛에 맞는 세계를 오간다. 그렇게 잠시 안온했던, 런던 최중심 오후의 공기.

아직 독일에 있던 작년 9월 말, 베를린 새 집으로 입주 날짜를 받아두고 나와 K는 뽈을 만나러 잠시 런던에 다녀왔다. 수개월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던 뽈이 드디어 서울에서 날아와 런던에 입성하고 얼마 안 되어서였다. 갑자기 영어를 쓰며 혼자 집을 보러 다닐 게 어지간히 고생이랴 싶어 손을 보탤 작정이었으나, 웬걸, 그는 혼자서도 대단히 잘하는 여성. 아무리 여러 번 런던에 와봤다 해도 그렇지, 그는 일찌감치 본인 들어갈 집도 구했고 도서관에 나가는 루틴까지 만들고 있었다. 민망한 기우였다.



심지어 그는 출국 전에 잡 인터뷰도 하나 잡았다. 우리는 실전 면접을 보기 전 이 곳이 어떤 분위기일지 확인해보자며, 흔한 동양인 여행객 행세를 하고 그의 예비-일터에 가보았다. 강남에서 손수 가게를 운영하고, 여러 도시에서 바텐더와 맥덕으로 활동한 이력으로 꽉 찬 뽈의 CV를 카톡으로 읽어보던 게 불과 얼마 전이다. 오후에 찾아간 그 가게는 두셋의 스태프와 손님 한두 팀이 전부였다. 20개가 넘는 탭에서 다양한 생맥주를 뽑아내는 곳. 무수하게 많은 크래프트 비어 캔으로 뚱뚱한 냉장고가 나무 갑판 한 켠에 줄 지어 있는 곳. 우와. 뽈이 이 탭하우스에서 일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주문한 잔을 손에 쥔 뽈의 얼굴은 쑥스러움, 기대, 부담이 뒤섞여 꽤나 상기되어있었다. 시끌시끌한 금요일 저녁, 홀을 누비거나 바 테이블 안쪽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을 뽈을 응원하며 - 다 함께 짠!



해외에서 일을 하고자 한다면 이 정도 태도, 이 정도 열의는 있어야 하는 건가. 뽈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당시 나 역시 베를린에서 일을 구해보겠다고 계획중이었지만, 속전속결로 자신 앞의 불확실성을 제거해내는 이 친구를 보면서 내가 정말 그걸 원했었는지 가만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뽈이 무척 괴로워하면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 그에 비해 내가 베를린에서의 구직을 신속하게 단념한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고 나는 그것 또한 마법 때문이라 하겠다. 나는 발견하지도, 그래서 간절하지도 않았던 어떤 마법.


우리는 그때 브렉시트만 조금 걱정하고 있었다. 지금이 어쩌면 브렉시트 이전의, 우리가 익히 아는 런던의 마지막이겠구나. 경제와 사회가 앞으로 얼마나 바뀔까? 과연 세상은 크게 변했다. 전 세계를 마비시킬 역병이 돌 줄 누가 알았을까. 걸어 다니는 거리, 앉은 자리마다 마음에 꼭 맞는 순간을 찾아내는 뽈이 방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런던은 그때의 오래되고 다양하고 우중충하고 세련되고 활기찬 그 도시로 돌아갈까. 부디 뽈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마법의 도시가 다시 문 지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기를. 씩씩한 뽈에게 세상이 안전하고 온전한 시간을 가져다주기를.








마무리도 뜬금없게 귀여운 수아 사진으로 할래. 작년 4월, 민들레가 가득 핀 일름 Ilm 공원에서. 바이마르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던 나에게 정말로 찾아온, 대단한 수아의 모습.

참, 민들레의 꽃말은 감사하는 마음이래.


꼭 기회를 만들어서, 다음번엔 야림이 있는 동네로 놀러 가 보고 싶다. 조금 시간이 흐르면 일본으로의 길도 다시 열리겠지. 이렇게 멀리서 일기를 쓰고 있는 우리는 이 시기를 어떻게 추억하게 될까. 야림의 동네에서 나는 어떤 것을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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