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째 런던 집. 아늑한 거실과 널찍한 다이닝 테이블이 있는 키친이 마음에 들어 이곳에 이사 온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키친에 있는 커다란 창 밖으로 보이는 이웃집 커다란 나무는 지난봄 진한 분홍빛의 꽃을 맺었고,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다운 우리 집 오브제가 되었다. 그 4월의 찰나가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또 보고 싶을 만큼 눈에 선했다. 어느새 계절은 두 번이 바뀌고 가을이 되었다. 꽃이 진 후엔 그 나무에 감흥이 떨어졌는데 9월의 끝무렵부터 점점 나뭇잎의 색이 변했다. 단풍이 들고 있는 거다. 가을이 오고 가는 걸 키친에서 바로 지켜볼 수 있다니, 예상치 못했던 호사구나. 그래, 이사할 때 집을 아무리 찾아가서 살펴봐도 직접 살아봐야 알게 되는 집의 모습이 있다. 불편한 것도, 훨씬 더 좋은 것도.
초록에서 빨강으로 변하는 그 앞에서 정말 오랜만에 이 페이지를 열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일상이 불만족스럽거나 나 자신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질 때면 나는 글이 쓰고 싶어 진다. 얽힌 감정과 생각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일기장에 무언가를 빼곡히 적지만 어쩐지 이 공간은 좀 다르게 느껴진다.
런던이라는 곳에서 산 지도 어느새 5년을 꽉 채워간다.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몰랐는데. 영국에 가고 싶다고 꿈꿨을 때, 여기서 사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그리고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구체적으로 알았다면 나는 선택했을까. 직접 경험해 봐야 아는 것들, 그리고 그 경험 속엔 분명 좋은 선택과 좋은 것만 있진 않다는 것도, 이젠 너무나 잘 알겠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땐 그저 좋은 마음만 품었는데, 이젠 너무나 달라졌다. 무엇이 나를 힘들게 했고, 무엇이 날 즐겁게 했는지 알았기 때문일까. 하지만 더 하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 아직 남아있는 게 있어서, 나는 여전히 이곳에 조금 더 있기를 원한다. 그래, 이게 딱 지금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이구나.
이런 마음을 가늠하기 어려워 나 자신을 다그치곤 했다. 자꾸만 흔들리는 마음을 남에게 보여주고 더 흔들리거나, 벽을 쌓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선을 넘어버리는 충고와 조언, 평가와 판단.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도 그렇게 들리는 말들에 지치기도 했다. 이럴 땐 내 안으로 파고들어 내가 나와 대화하는 수밖에. 그래서 이 페이지를 열었다. 내가 나와 대화하고 싶어서, 자주 흔들려서 알아채기 어려운 내 마음을 똑바로 바라보고 싶어서. 겹겹이 쌓여버린 마음을 글을 통해 마주하고 싶어서, 그래서 펜을 손에 쥐지 않고 대신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쏟아내는 게 아니라 바라보고 싶어서.
창문 밖 나뭇잎은 초록과 빨강, 주황과 노랑이 아주 적절하게 섞여있는 지금, 10월의 중간. 언제쯤 완전히 붉어질까? 그리고 언제 떨어질까?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은 겨울의 모습은 어떠려나. 올해는 런던에 눈이 좀 쌓였으면 좋겠다.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그땐 내 마음을 좀 더 선명하고, 섬세하게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