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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05. 2022

진정한 정직함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직을 가장하는 자들에게.

葉公語孔子曰: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葉公이 孔子에게 말하였다. “우리 黨에 몸을 正直하게 행동하는 자가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羊을 훔치자, 아들이 이것을 증언하였습니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黨의 正直한 자는 이와 다르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하여 숨겨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하여 숨겨주니, 正直함은 이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 장은 여러 가지 의미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장이다. 정직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정직이라는 도덕적 개념이 천륜(天倫)이라는 개념과 혼재되어 딜레마 상황일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사상가에 따른 정의규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공자로 대답으로 대표되는 유가(儒家)의 사상과는 달리 법가(法家)의 입장에서는 공자의 견해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궤변이라는 공격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법가(法家)의 입장이 아니라 하더라도 부모가 형사처벌을 받을만한 죄를 저질렀을 때 그것을 알게 된 자식이 그것을 곧이곧대로 신고하고 처벌받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덮어주는 것이 옳은 것인가는 논란 이전에 충분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임에는 틀림이 없다.     


원문에서 ‘몸을 正直하게 행동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한 ‘直躬’에 대해서도 후대 학자들의 의견이 보태져 본래는 고유명사가 아닌 성향을 표현하는 말이었으나 이후 그것이 사람의 이름으로 전성되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어 눈길을 끈다. 먼저 이 부분에 대해 주자가 해설해놓은 주석을 참고하여 행간의 의미에 접근해보기로 하자.     


‘直躬(직궁)’은 몸을 정직하게 행동하는 자이다. 因(인)함이 있어 훔치는 것을 攘(양)이라 한다.  

주자는 나중에 나오는 공자의 대답을 변호하기 위함인지 ‘因(인)’이라는 설명을 넣으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경우를 한정 짓고 있지만, 공자가 아주 이례적인 예외의 상황을 가지고 이야기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편, 섭공(葉公)이 정말로 그것이 정직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공자에게 자랑을 하려고 말한 것인지 그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공자는 그것에 대해 단호하게 다른 의견을 밝힌다.     


부모과 자식이 천륜을 통해 맺어져 서로를 위해 숨겨준다는 내용보다 더 주의 깊게 봐야 할 부분은 마지막 문장의 ‘正直함은 이 가운데 있는 것이다.’이다. 먼저 이 부분에 대해 주자가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아버지와 자식이 서로 숨겨줌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의 지극함이다. 그러므로 정직하기를 구하지 않아도 정직함이 이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 주석은 앞선 문장에서는 유가(儒家)의 가치관에 대해서 표방하고 있지만, 뒷문장은 배우는 이들조차 약간 고개를 갸웃할 정도의 애매모호한 설명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기미가 적지 않게 섞여 보인다. 왜냐하면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장에서 섭공(葉公)이 이 화두를 꺼낸 것은 두 가치관, 즉 사회적인 가치관과 인간으로서의 천륜이라는 가치관의 충돌이 있을 경우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한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유가의 가치관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정직함을 별도로 구하지 않아도 된다니, 게다가 이미 그 정직함이 천륜의 지극함에 담겨 있다니 논리적으로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는 설명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마지막 문장은 공자가 말한 진정한 행간의 의미를 파악한 자만이 설명할 수 있는 대목이라는 점에서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설명이 아니다.     

주자의 주석을 읽고 나서 그런 혼란을 느꼈을 배우는 이들을 위해, 사씨(謝良佐(사양좌))는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두 대립되는 가치관이 동시에 양립할 수 없다는 정리를 해준다.     


“理(이)를 따르는 것이 정직함이 되니, 아버지가 자식을 위하여 숨겨주지 않고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여 숨겨주지 않는다면 이에 순하겠는가. 瞽瞍(고수)가 사람을 죽였다면 순 임금은 고수를 몰래 업고 도망가서 바닷가를 따라 살았을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세하니, 〈자신의 행동이〉 정직한가 정직하지 않은가를 어느 겨를에 따지겠는가.”     


이 주석은 솔직하게(?) 무엇이 우선인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본래 섭공(葉公)이 언급한 이 일은, 춘추전국시대 초(楚) 나라 때 직궁(直躬)이 그의 아버지가 ‘攘羊’이라는 범죄행위를 저지른 것에 대해 고발하여 자기의 정직을 밝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直躬證父’라는 고사성어가 된 일화로, ‘고지식하게 한 행동으로 도리어 도리에 맞지 않음’을 의미하거나 ‘인정머리가 없이 고지식함’이라는 의미를 비꼬는 사례로 자리 잡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당신을 포함한 배우는 자들이 간과한 개념의 차이가 있다. 공자가 이 장에서 말하는 설명은 섭공(葉公)이 말하는 일반적인 두 가치관이 배치되는 딜레마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주석에서 주자가 말한 ‘천리와 인정의 지극함을 다하는 것이, 정직하기를 구하지 않아도 정직함이 이 가운데 있게 된다’는 설명의 근원을 이해할 시간이다.     

공자는 ‘진정한 정직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답변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섭공(葉公)이 들어서 인용하는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그 애매모호한 가치관의 대립이 실제로는 대립할만한 사회적 양가치가 아님을 한 마디로 구분해준 것이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공자에게 있어 ‘직(直)’이라는 개념은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정직(正直)’으로 혼용하고 있는 ‘말 그대로의 솔직하게 거짓 없이 말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공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본래 ‘직(直)’이란 감정은 내 가슴속에서 ‘있는 그대로 우러나오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정직’이란 그 ‘직(直)’보다 좀 더 세분화된 하위 개념임을 알 수 있다.     


한 때 한반도에는 이념 때문에 마을 사람들끼리 혹은 가족끼리까지도 섭공(葉公)이 이야기한 그 상황에 직면한 적이 있다. 공산당이 득세하여 죽창을 들고 자본주의자들을 죽이자고 할 때 부모와 자식의 이념이 다른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잡히면 자본주의자들을 옹호했다는 죄명으로 죽창에 찔려 죽어야 하는 상황을 알면서 자식이 자기 부모를 고발하는 것이 정직인가? 혹은 그렇게 죽창을 들고 마을 사람들을 처단하고 다녔던 자식을 잡아서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기 위해 집에 숨어든 자식을 그들에게 내주는 것이 정직인가? 


이념의 앞에서 정직을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의 실제상황이 우리 땅에서는 벌어진 바 있다. 대개의 경우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천륜(天倫)으로 맺어진 부모와 자식이 고발하는 것은 당연한 정직이 아니라고 고사성어까지 나왔던 것은 공자의 시대에나 그간의 세월이 흘러 최첨단의 세상이 되었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금 복잡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으나 법가(法家)에서 말하는 원칙이 무엇을 위한 것이고 법이나 사회 규정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사회적 규정이나 법령은 부모나 자식 간의 신고나 처벌을 강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을 해하면 안 된다라던가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거나 훔치면 안 된다던가 사람들의 생명을 함부로 해하면 안 된다라던가 하는 것은 상식적인 것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사회가 원만하고 갈등이나 사고가 없이 굴러가기 위해 범죄행위라는 것에 대해 처벌하기 위한 법령이 마련되고 양형기준을 위해 법이라는 형태로 성문화 되면서 법령은 사람들의 규제하는 하나의 규격이 마련된 것이다. 


법령이 되는 순간, 해서는 안될 행위는 처벌에 더 무게를 더하게 된다. 즉, 처벌을 받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그 처벌을 받지 않으려면 그런 범죄행위를 해서는 안된다고 강제하는 강압수단으로써 작용할 뿐, 그 행위를 하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선도하거나 사회적으로 그런 병폐가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조치에는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정리하자면, 법제적 합리성은 언제나 한계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의 설명에 의하면 법규 이전에 상식적으로 지키야 할 것들을 익히고 그것에 대해 교육을 받아 바르게 성장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가르쳐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른바 밥상머리 교육에 해당하는 것이다. 한편, 부모가 자식을 낳고 자식에게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보고 듣고 익힐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의무이고 책임이지만, 반대로 자식이 성장하고 부모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자식이 끊임없이 간하여 부모가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섭공(葉公)이 든 사례처럼 부모가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며 자식이 신고하여 처벌하게 하는 것은 그 부모가 처벌당하게 하는 행위에 한정된 것으로 부모가 바르게 돌아오도록 간하는 행위가 아니기에 그것은 공자의 기준에서 보면 ‘직(直)’의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결국 공자의 말하는 ‘직(直)’의 개념은 요즘 현대 한국에서 그렇게 떠들어대는 ‘진정성’의 문제와 결부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뜬금없이 왜 진정성이 정직의 개념을 논하는 이 상황에 튀어나오는가 의문이 드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라. 공자의 개념 규정대로라면 정직을 지향하겠다고 고지식하게 굴었던 그들이 과연 그렇게 행동하고 마음이 편했을까? 공자의 설명이 궤변이라며 범죄행위는 범죄행위일 뿐 왜 그것이 혹은 무엇을 위해 그들이 정직을 표방하여 부모와 자식을 서로 고발하고 신고하도록 하는 것을 정직이라 했을까?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정직은 어떤 다른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치 만행 사진자료 중에서

나치가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잡아갈 때도 가족이나 친지가 아니었음에도 유대인들을 감춰주고 도와줬던 사람들이 있는 반면, 친구나 지인이었으면서도 유대인을 신고하는 자들이 있었다. 일제 식민지 치하 당시 친일파들이 앞장서서 독립투사들을 잡아서 고문하고 죽인 것이 그들이 정직을 갈구하고 정직하게 살고자 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제 식민지 치하 당시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 당시의 상황으로 조금 들어가 보자. 우리 독립투사들이 일본 정치인들이나 군인들에 대해 항거라는 이름으로 도시락 폭탄을 던지고 암살을 행했던 것에 대해 우리는 훌륭한 독립운동이었다고 위인이라고 칭송한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그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암살범으로 재판하고 사형을 구형했다. 일본이 이상하다고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독일이 일본보다 훨씬 더 높은 도덕성을 가진 선진국으로 인정을 받는 이유는 독일인들이 같은 독일 민족의 입장에서 이전 세대가 잘못한 행위를 한 것에 대해 객관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상황에서 서로 죽이고자 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 서로 다른 목적과 신념을 가지고 한 행동에 대해서 어느 한쪽이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겠지만 독일이 나치의 비인도적인 행위에 대해서 사과하고 사죄한 것과 일본이 아직도 그들의 입장을 고수하며 야스쿠니 신사에 일급 전범들을 자신들의 위인이라며 칭송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역사학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그 큰 차이를 잘 안다.     

인간의 도덕성이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에 공자는 ‘시중(時中)’을 강조한 바 있다.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 그때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판단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며 군자(君子)를 목표로 하는 배우는 자가, 이해하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의 적절점을 찾아 늘 최선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 하였다.     


지난주 파란당의 대선후보였던 이의 아내가 소환되어 기소의견으로 송치된 일과 조국 일가의 재판 중 검찰이 제시한 카톡 메시지 정황이 뉴스에 보도된 것을 보면서 이 장을 떠올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수천 년 전 중국에서 있었던 일반 사람들의 입에서 돌고 돌았던 상황은 수천 년이 지난 최첨단 과학이 융단처럼 깔려 있는 대한민국의 오늘날 그대로 반복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대학총장 출신이면서 장관으로 지명되었던 이가 총장 시절 법인카드로 얼마나 많은 금액까지 이른바 법카를 펑펑써댔는지, 이제는 장관이 된 사람이 도지사를 하면서 자신의 개인 돈이 아닌 공금에 해당하는 돈으로 그와 유사한 행위를 어디까지 했었는지, 아니 그저 이름 없는 지잡대의 교수들이 정부 지원사업이랍시고 법인카드를 만들어 그들이 과연 몇 번이나 자기 카드로 밥을 사 먹고 술을 사 먹는지, 외교부 직원들이 회의록이라고 만들어 실제로 함께 회의하지도 않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집어넣고 자신들의 돈으로는 언감생심 갈 수도 없는 이탈리안 식당에 가서 대낮부터 고급 와인까지 곁들인 식사를 하고서도 회의비로 청구한 금액이 왜 수년간에 걸쳐 아무런 문제도 없이 묵과되어 넘어갈 수 있었는지 당신은 결코 모르지 않는다. 

당신의 ‘직(直)’이라는 것은 결국 당신이 그들과 이익을 공유할 때는 진정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당신 역시 모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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