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충실한 기록과 복기를 통해 그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다.
한국에 있지 않아서도 그렇지만 역사 자체가 스포인 영화를 굳이 볼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을 하다가, 당시의 역사를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는 아이들에게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재미있는 영화로 현대사를 소개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미루던 <서울의 봄>을 봤다.
연말 개봉하고 나서 2030 세대들의 분노치수가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치달리는 이야기 흐름을 따라 ‘심박수 챌린지’라는 기괴한 유행으로 무려 1300만의 관객수를 동원하였으니 여전히 김성수 감독의 영화판 생존 센스는 유효하다는 사실도 재삼 확인하였다.(굳이 이런 표현을 쓰는 이유는, 한때 잘 나갔던 감독이나 작가들이 최근 몇 년간 망작의 다량 양산을 통해 스스로의 바닥을 드러내고 마는 일들을 워낙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잘 만든 영화라고 평가하기에는 묘한 위화감이 들지만, 앞서 표현한 그대로 김성수 감독의 생존 센스는, 자신이 당시 고3이었고 의문의 총성에 내내 의구심이 들었다는 듯한, 마치 자신이 처음부터 기획했던 영화인 것처럼 마케팅 인터뷰를 하는 것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역시나 그의 인터뷰에서 고스란히 드러난 진실은, 원래 그에게 왔던 처음 영화 시나리오가 다큐멘터리였고, 그가 영화를 만들겠다고 한 조건에 자신이 거기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자신의 색깔을 입히겠다고 결심하고 작업을 다시 했다는 말에서 드러난다.
너무도 뻔한 실존인물들의 이름 바꾸기는, 이미 역사가 스포인 사건을 영화로 만들면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묘한 선례를 만들었다. ‘이 이야기는 실화가 아닙니다.’라고 대놓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실화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하며 논쟁을 피해 가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화를 바탕으로 그대로 실존인물들을 쓰지도 않고 이상한 작명으로 그들임을 도리어 인증하는 일들도 그러하다. 무엇보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 직전에 하나회 출신들이 저마다 이후에 어떤 승승장구한 인생들을 살았고 어떤 보상을 전두광(전두환)에게 받아먹었는지를 나열하는 것부터가 김성수 감독이 이 영화에 처음부터 씌우려고 했던 새로운 방식의 틀임을 알 수 있다.
실화지만 모두가 실화는 아니고 그렇다고 모두가 가상의 상상력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대표적인 정의의 화신이자 주인공인 이태신 장군이 실존인물도 아니거니와 반란군에 반대하고 진압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3명의 인물(수경사령관, 특전사령관, 헌병감)의 행적과 워딩이 역사적 팩트는 아님을 이리저리 섞어버린 후,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했다.’는 한 마디로 모두 퉁쳐버리는 마법(?)을 부린 셈이다.
그런데, 그것이 영화를 더 흥행시키기 위한 장치였는가를 생각해 보자면, 그것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실제로 뻔히 누군지 아는 인물들의 이름을 바꾼 가장 큰 이유가, 이미 두 차례의 드라마를 통해 이태신의 원래 모델에 해당하는 장태완 장군을 그대로 장완태정도로 바꿔서 사용했으면 모르겠으나 현실에는 존재하지도 할 수도 없는 이태신이라는 새로운 히어로를 만들어 내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기존 TV드라마에서도 12.12사태를 다룬 부분들이 초창기 드라마에 처음 다뤄질 때만 하더라도 장태완 장군을 연기했던 연기자가 비중이 크지 않은 연기자의 그저 그런 연기정도에서 점점 사건의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비중 있는 연기자의 사이다 연기로 변모하는 것을 드라마의 역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그 근거이다.
2010년에 타계한 장태완 장군의 타계 전 그나마 최근에 장태완 장군을 연기했던 연기자들 중 두 명(김동현, 김기현)은 인기열풍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장년층들에게 당시 뜨거운 인기를 끌었더랬다. 그런데, 흥행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재미나게 꾸며내는 거에 이골이 난 김성수 감독의 눈에는 다큐멘터리로 TV드라마를 재탕해서는 원하는 결과를 얻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을 공산이 크다. 그래서 가운데 그 사람의 아이덴티티에 해당하는 성은 그대로 가져오지 않되, 본래 모델이 되었던 장태완 장군의 ‘태’ 자 정도만 가져오되, 정말로 역사에서 이 정도 인물정도는 있어줬으면 하는, 영화에서만 가능한 히어로를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감독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려고 한 것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영화에서만 가능한 사이다 상상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던가?
아니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자신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너무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편집포인트와 카메라 워킹만으로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명료하기 그지없다.
최근 공개되었던 <킬러들의 쇼핑몰>에서 엉성하기 그지없는 교차편집이나 과거회상의 반복적이어서 지루하고 짜증스럽기 그지없는 편집방식과는 별개로, <서울의 봄>이 흥행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가장 큰 킬링 포인트는 군더더기 없는 속도감 있는 전개였다. 앞서 언급했던 분노게이지의 증가를 확인할 수 있는 심박수 챌린지가 가능했던 것도, 작정하고 군더더기 이야기들을 모두 빼고 사건의 긴박함을 관객이 그대로 따라 달리지 않으면 이야기를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만드는 편집 포인트가 바로 그것이다.
아, 그것과 감독의 메시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그 속도감 있는 전개 속에서 턱턱 달릴만하면 브레이크를 거는 분노유발자들에 대해서 한 템포 쉬어가는 듯하면서 일부러 부비트랩 터지듯 천천히 포커스를 더 키워 조명하는 방식이 감독의 메시지를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가장 대표적인 분노유발자이자, 이 역사적인 사건을 뒤집어버린 바로 그 편집포인트의 인물, 국방부 장관(노재현) 역할을 했던 이의성 배우의 연기에 방점을 찍은 것이 그러하고, 육군참모총장이 납치된 이후, 벙커의 지휘역할을 하며 우유부단하기 그지없는 무력한 모습을 보인 참모차장(윤성만) 역할의 유성주 배우의 모습에 안전턱처럼 턱턱 걸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편집점이 바로 그러하다.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연역할을 맡을 정도의 비중이 있는 정해인이나 이준혁을 굳이 특전사령관의 부관이나 참모총장의 부관역할로 삼은 것도 감독의 의중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장치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스토리나 흐름으로 봤을 때는 반란군을 진압해야 한다는 사령관의 부관정도이고 총 맞아 죽는 단역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자리에 주연급 배우를 쓴 것은 어떤 의도였는지 당연히 관객들이 한 번쯤 고개를 갸웃해 주기를 감독은 바라지 않았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비중이 관객들에게 시선을 끌어 기억에 남게 하기 위한 안배와 그들의 연기내공이 보여주는, 당일에 있었던 사태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이들의 판단과 그 결과로 인한 죽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는가,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여러 장치들 중에서도 영화의 기본 중의 기본, 그리고 위에 언급한 여러 장치들이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되는 방식은 바로 캐릭터의 워딩, 즉 대사이다.
이태신을 통해 감독은 이 영화에서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타임머신을 타고 그날에 들어간 관객들에게 그대로 외치고 또 외친다. 워딩과 발성이 그다지 훌륭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정우성의 목소리가 갈라지면서 설득력을 갖는 것은, 드라마에서 마지막으로 장태완 장군역할을 했던 성우출신의 김기현 배우를 가져다 놓은 것과는 또 다른 의도를 보여준다.
굵직하고 정신이 퍼뜩 들게 하는 성우출신의 배우 워딩보다 어설프고 갈라지고 엉성한 워딩에 발성이지만 절규하는 듯한, 그간 세월로 누적되었던 정우성의 연기내공이 도리어 관객들의 마음에 콱 가서 박힐 것이라는 감독의 의도는 여실히 적중되었고 그것은 평단과 흥행면 모두에 의해 증명되었다.
“내 눈앞에서⋯ 내 조국이 반란군한테 무너지고 있는데! 끝까지 항전하는 군인 하나 없다는 게⋯ 그게 군대냐. 남들이야 내 알 바 아냐. 각자 자기 소신대로⋯ 인생 사는 거니까. 하지만 봐라, 내 이름 앞에 뭐라고 쓰여있는지. 수도경비사령관이 서울을 내버려 두고 어디를 가라는 거야. 오늘 밤 서울은 끝까지 우리 부대가 지킨다.”
사실 이 영화의 대사를 통한 메시지 전달은 이렇게 대놓고 외치는 것보다 사이사이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면서 알아먹을만한 사람들을 알아들을 거라며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쓴 묘한 대사들에 그 방점이 닿아있다. 대부분 그 대사들은 시민들을 언급하는데에서 등장하는데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태신: 가만 생각 좀 하자... 그러니까, 그 놈들이 서울로 오려면은... 무조건 영등포를 거쳐야 돼. 제2한강교로 오겠지. 아님 서울대교를 건너거나, 이 쪽으로 길게 돌아도 제1한강교를 지나서 오게 된다.
강동찬: 하지만, 여기 이 다리들 전부 방어하려면 최소 사단 병력 이상이 필요합니다.
이태신: 아니야, 우리가 막는 게 아니야... 시민들이 도와야 돼...
이태신이 말한 궁극적으로 이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이들은 ‘시민’이라고 콕 집어 말한다.
결국 육본 벙커를 버리고 도망가려는 장관과 참모차장 등등을 보며 절규하는 헌병감의 대사도 의미심장하기 이를 데 없다.
김준엽: 장관님, 육본은 누가 지키는 겁니까?
오국상: 아니, 장관이 육본 지키는 사람이야?
그렇게 마지막으로 헌병감은 절규하듯 외친다.
“저놈들 때문에 나라가 뒤집어지면, 이건 우리 군의 수치고 치욕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결국 쿠데타로 욕망에 꿈틀대던 이들을 향해 지 하나 살겠다고 눈치 보며 다들 어영부영하던 상황에서 굳이 죽음을 맞지 않아도 될 특전사령관의 부관 소령(정해인 분)은 사령관과 이런 대화를 나눈다.
공수혁: 진호야. 너⋯ 안 무섭냐?
오진호: 솔직히⋯ 두렵습니다. 하지만 사령관님과 함께 할 수 있잖습니까.
공수혁: 오진호, 똑똑한 줄 알고 데려왔더니만 좀 모자란 데가 있는 것 같다 너?
옳다고 생각한 대로 움직인 이들이 왜 이런 허망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는지 ‘모자라다’라는 세속적인 의미의 찬사(?)가 역설적으로 그런 이들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정해인이 연기했던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이던 김오랑 소령의 양친은 아들의 허망한 죽음과 반란군의 득세를 보며 화병으로 돌아가셨다고 전한다.
기가 막힌 것은, 반란군에게 질질 끌려가 이 날의 사태를 완성시킨 국방부장관 노재현은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심지어 요 몇 년 전에 국립현충원에 안장되기까지 했다는 사실이다.(그 자손들은 자신들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국방부장관이었다고 거들먹거리다가 이 영화를 본 친구들에게 그 이의성 배우가 연기한 국방부장관이 바로 내 아버지이고 할아버지야,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굳이 내가 한참이나 뒷북인 이 영화의 평을 빙자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말했다.
역사를 기록하고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라고.
박정희의 쿠데타를 보면서 자기도 할 수 있다고 여긴 전두환은 기어코 쿠데타를 일으켰고, 영화에서처럼 극적인 성공을 거두고, 그 반란에 동참한 이들은 현충원에 안장되고 내내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누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가?
바로 당신들이다.
영화를 보면서 드라마를 보면서 분노에 심박수가 올라갔다고?
작금의 현실은 그때와 과연 다른가?
지금의 현실이 다르다면 왜 그 쓰레기들의 자손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는가?
아니, 일제 강점기 친일파들에서부터 늘 그래왔고, 그들의 끝이 여전히 승승장구이기 때문에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영화에서 분노유발자가 정작 전두광을 필두로 한 반란군이 아니라, 국방부장관이고 참모차장인 이유를 당신의 양심에 대고 물어봐라.
내 경우 분노유발수치를 극대화했던 것은, 이태신의 간곡한 부탁에 마치 처음에는 정의의 편에서 지지하는 듯했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자, ‘어쩔 수 없다’는 개소리를 입에 머금고 자신의 안위를 지키면서 ‘이미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짖어대는 자들이었다.
당신은 과연 그런 자들과 다른가?
왜 옳지 못한 것을 바로잡자고 하는 이들이 ‘모자라다’ 거나 ‘사회성이 없다’라는 말도 안 되는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이승만의 공적이 뭐가 어쩌고 어떻다고?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한 자들의 끝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결국 반란죄로 죄수복을 입고 어쩌고 말년 정치 퍼포먼스까지 했지만, 그들은 잘 먹고 잘 살았고, 그들의 자자손손 잘살았다는 악인 헤피엔딩의 현실만을 보아왔기 때문에 그렇다.
지금도 우리 앞에는 여전히 악인들이 설치며 자기 이익을 챙겨달라면서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제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