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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29. 2024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남에게 관심이 많은가요?(2)

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려주마. - 62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822     


  한반도는 춥고 산지가 많은 데다가 지하자원이 거의 없는 축에 속합니다. 천연자원이 없으니 가진 건 사람(인적자원)뿐이고, 조금이라도 더 배워서 부가가치를 창출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경쟁 위주의 교육체계는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했습니다. 한국인에게는, 그러한 생존을 위해서 상대와 나의 위치를 확인하고 경쟁하는 심리가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본래는 나의 위치를 수시로 확인하고 상대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아야 한다는 경쟁심리와 사회구조는 한국인들을 이전과는 다른 DNA로 바꿔놓게 됩니다.


  계층 분화의 역사가 긴 나라를 가보면 자본축적 정도에 따라 거주지와 활동지가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각 계층끼리 비슷한 지역에서 생산하고 소비한다는 어찌 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인 거죠. 지역끼리 물리적으로 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게 되면 당연히 그 지역사회 간의 교류도 적고 소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광활한 대륙을 가로지르며 슈퍼에 장을 보러 갈 때도 차가 필요한 미국의 경우, 계층(사실상 인종)마다 사는 지역이 다르고, 다른 사회 간의 물리적 심리적 간극이 있기 때문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집들에 대해서 굳이 관심을 보이거나 알고 싶어 할 필요나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단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봤을 때, 서울을 시준으로 인구밀도가 글로벌 대도시 중에서도 1위에 해당할 정도임을 보여줍니다. 한국의 서울은 인구밀도 6위 도시로 1~5위까지가 인도, 방글라데시, 이집트의 도시들인 것을 감안하면 한국의 서울이 얼마나 인구밀도가 촘촘하게 꽉 차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구 1천만 명이 한 도시에 몰려 살면서 계층 상관없이 지하철을 이용하며 출퇴근하는 서울에서는 의미를 막론하고 특정계층들을 지역적으로 확연히 분화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데요.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이 서로의 생활을 바로 앞에서 바라보며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지하철만 타도 수도권의 끝 변두리에 사는 계층들도 언제든 몇 시간 걸리지 않아 고급 인프라가 집중된 강남까지 들어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의미죠. 사람들이 촘촘하기 그지없어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기에 쉬운 구조라는 데에 지정학적으로 한국은 부합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SNS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가뜩이나 허술하기 그지없던 물리적 장벽은 이제 아예 허물어져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친밀하고 가까워지는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이젠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를 구분하는 것 자체도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리는 허상의 세계와 현실이 혼재되고만 시대가 도래하고 맙니다. 그저 짧은 시간 사진이나 몇 마디 문장만으로 보이는 SNS문화의 특성상,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다른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하며 질투심을 느끼고 때때로 상대적 자기 위안을 느끼기도 합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한국인에게서 보이는 질투심의 근원자체가, 자원도 없는 척박한 나라에서 모두 다 비슷한 조건에서 잘살아보겠다는 경주를 시작했는데 이게 시간이 지날수록 누군가 나보다 앞서가는 모습이 내 바로 옆에서 너무나도 잘 보인다는 점에서 남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질투와 질시로 변질되기 쉬웠다고도 분석할 수 있겠습니다. 


  21세기 대부분의 국가들은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을 보장받는다는 이상적인 이야기를 모토로 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100% 평등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영국, 일본,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 국가는 여전히 왕족과 귀족이 존재하고 그 신분 이상의 무언가가 더 강한 신분제를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끝판왕이라고 자부하는 미국은 자본 축적의 정도에 따라 계층이 나누어졌고, 그것이 봉건시대의 신분제보다 훨씬 더 강한 계층 문화를 형성하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서구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역사가 200년도 넘게 이어져온 터라, 자본 축적 기간이 동양에 비해 훨씬 길었고 사회 계층 분화가 오랫동안 이어져 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상을 오히려 정치학, 마케팅 등등에서 연구해 폭넓게 활용하며 일상생활에도 계층에 관한 학설과 이론들은 더 논의할 부분이 없을 정도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에 반해,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신분 사회가 그제야 완전히 철폐되었죠. 조선시대의 마지막 끝물이라고 할 수 있던 당시 양반 비율이 1~2%였는데, 2024년 현재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어차피 보지도 않긴 하지만 집집마다 양반의 족보를 갖고 있다는 아이러니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거기에 더해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국가와 사회의 베이스가 제로 베이스 상태로 리셋되면서 모두는 타의에 의해 불가피하게 ZERO BASE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업화의 중심 베이비 부머 세대를 보면 라떼 이야기에 언급되는 가정환경이 거기서 거기인 것은 그러한 이유입니다.(물론 친일파의 베이스를 깔고 시작한 자들에 대한 부분은 논외로 하고 말이죠.)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장남은 대학 보내고 딸은 공장 취업시켰다가 시집보내는, 일종의 공식까지 있었던 터였습니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비슷한 조건에서 출발했기에 불만이나 불평이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그 제로베이스에서 산업화를 거치며 자본 축적을 해서 선진국의 대열을 꿈꾸기까지의 기간도 60년이 안되었기에, 너도 나도 똑같다는 평등의 개념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힐 수밖에 없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과거 경제성장 시기에는 한국인의 질투심 덕분에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고서는 달려 ‘한강의 기적’이라는 과실을 맛볼 수 있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성장 시대에서는 이러한 개도국을 거쳐 선진국의 대열까지 넘보는 최단기간의 기록을 경신해 냈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눈에 띄기 마련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축적되는 자본에 의해 계층 간 격차는 더욱더 크게 벌어질 것이고, 이에 따른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현재 한국사회가 갖는 문제들은 모두 일촉즉발의 불균형과 비정상의 퍼레이드를 펼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종합적인 이유들이 얽히고 섥여, 앞서 살펴보았던 한국인만이 가진 질투심을 배태하게 된 것이고, 경쟁위주의 교육체계로 성적만을 따져 그것으로 등급을 나누는 것에 익숙한 교육체계를 양산하게 하였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플 수밖에 없는 심보를 탄생시키기에 이른 것입니다.


  전쟁에 참가한 군인이 다리 한쪽을 잃게 되었을 때, 자신의 옆에 있던 아군들이 모두 전멸하여 죽은 것을 알게 된 경우와 모두가 무사한 상태에서 자신만 다리를 잃게 된 경우의 심리는 분명히 다르다고 심리학에서는 말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다리를 잃게 되었다는 팩트는 변화가 전혀 없는데 말입니다.


  끼니를 걱정하며 배를 주리던 한국은 이제 선진국 대열을 넘볼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치하의 서글픔과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제로 베이스에서부터 시작했어야만 했던 그 처절한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면, 내내 똑같이 시작했음에도 누군가가 나보다 더 많이 벌고 더 잘 살게 된다는 것자체만으로도 자신의 노동이나 자신의 고생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전락되거나 도리어 자기 위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남을 의심하는 DNA는 어찌 보면 너무도 웃픈 한국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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