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누구인들 밖을 나갈 적에 문(門)을 경유하지 않고 나갈 수 있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이 도(道)를 따르는 이가 없는가?”
<논어>에서 자주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비유가 등장하였다.
안에서 밖으로 나갈 때 문(門)을 통해서 나가지 않는 사람은 없다. 벽을 뚫고 나가지 않고 천장을 뚫고 나가지 않는다. 결국 문(門)은 사람이 다녀야 하는 출구(出口)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것이고 그것은 당연(當然)한 상식이다.
그 비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바로 죽비가 날아든다.
그런데 왜 이 문(門)을, 이 도(道)를 통해 가지 않느냐고.
이 장에서의 핵심 비유는 단 하나, 사람이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식은 당연히 모두가 그렇다고 통용하는 문(門)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내면에서 행동으로 밖에 표출할 경우 도(道)를 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공자가 왜 갑자기 이 형이상학적 비유를 했는지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사람이 밖을 나갈 적에 문을 경유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마침내 이 도를 따르지 않는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괴이하게 여겨 탄식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강조점이 있다. 바로 도(道) 앞에 쓰인 ‘이것’이라는 ‘斯(사)’字이다. 이 대명사는, 앞에서도 <논어>에서 사용되는 대명사는 대개 강조를 위해 사용된다고 했던 바로 그 의미이다. ‘바로 이’라는 의미인데, 여기에서는 두 가지 강조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너무도 당연한 상황임에도 그것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답답함을 나타내는 것과 다른 것도 아니고 당신이 그렇게 목이 터져라 외쳤던 바로 그 ‘道’ 임을 강조하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뜻을 이해한 홍씨(洪氏)가 그 도가 보이지 않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이 나갈 적에 반드시 문을 경유해야 할 줄은 알면서도 행동할 때에 반드시 도를 따라야 함은 알지 못하니, 도가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도를 멀리할 뿐이다.”
문은 그 자리에 있지, 움직이지 않는다. 그 문을 경유하지 않는 사람들만 있다. 문이 있는데도 일부러 창을 부수고 나다니고, 천장을 뚫고 다니지 않는데, 그렇게 당연한 것임에도 문은 경유해서 다니면서 도를 행하지 않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탄식한 것이다. 그런데 도 역시 문처럼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자기 자기에서 본질, 그대로 있는데, 사람이 멀리하는 것뿐이라는 해설이다.
그렇다면 과연 공자가 이 장에서 말하는 그 斯道(사도)는 무엇인가?
세상이 덕(德)이라는 문을 통해서 다스려졌다면, 당시의 시대 상황처럼 도(道)가 무너져 여러 제후국들이 서로 힘의 논리로 저마다의 이익을 위해 사악함의 길을 따르는 약육강식이 횡행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넓게 전체를 읽는 시각을 갖출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굳이 옹야편(雍也篇)에서, 앞서 자상백자(子桑伯子), 담대멸명(聃臺滅明), 맹지반(孟之反), 축타(祝鮀), 송조(宋朝) 등은 공문(孔門)에서 수학하지 않은 동시대에 이름을 대면 알만한 이들에 대해서 평가한 뒤에 바로 이 내용을 붙였을지 그 편집 의도를 읽을 필요가 있다.
저마다 차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긴 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뛰어나다고 인정을 받은 인물들임은 이미 공부하면서 살펴본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물들에 대해 모두 각기 평가한 후에 마치 총 정리하는 느낌으로 이 장에서 ‘세상에 어찌 이 도를 따르는 사람이 없는 것인가?’라고 한탄하는 것은 바로 이전 장에서 힌트를 준 것에 이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괜찮다고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내면의 도나 수양하여 이룬 인(仁)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세태를 비판함과 동시에, 세태가 그러하니 제대로 공부하여 그것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이들도 보이지 않는다는 신랄한 비판의 일갈에 다름 아니다.
사실 이 장에의 핵심 키워드는 문(門)이다.
이 장에서 공자가 굳이 문(門)을 메타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신의 한 수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중의적인 의미로 공자가 말하려고 하는 의도를 세 가지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앞서 억지스럽게 강조하긴 하였으나 사실 문(門)으로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없다. 아무도 창을 뚫고 다니거나 천장을 부수고 다니지 않는다. 그 말인즉은, 너무도 당연(當然)히 그래야 한다고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약속한 것을 의미한다.
둘째, 더 나아가 그 통과하는 행위 자체가 굳이 부러 인식하고 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仁)이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에 대해서 앞서 공부할 때, 하려고 하는 마음을 갖는 것 자체도 장애가 된다고 읽은 바 있다. 그런데 문(門)을 통과하면서 내내 천장도 아니고, 창문도 아니고 바닥을 뚫고 가는 것도 아니고 문(門)으로 가야지, 하고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호흡의 수준에 해당하는 인(仁)의 경지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셋째,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기도, 짐승도 문(門)을 통해서만 통행한다. 교육을 받지 않아도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다른 어른들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굳이 문으로만 다녀야 한다고 아무도 강조할 필요도 없고 특별한 교육도 필요 없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자신의 ‘이 도’는 그러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하고 수천 년 전에 자신의 도를 설명함에 있어 이 세 가지 숨은(사실 숨긴 적도 없다. 눈앞에 있는데 읽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뿐이다.) 의미와 의도까지 읽어낼 수 있는 자는 이해하라고 메타포를 툭 던지는 듯한 공자의 화법과 철학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도는 행해지지 않았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모양 이 꼴인지에 대해 원인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수천 년 전 중국에서 공자가 의문을 열었으니 그 의문을 받아 수천 년이 지난 한국에서 발검 무적이라는 무명자가 답한다.
사람들은 결국 너무도 당연한 상황에 대해서도 ‘각자의 사정(事情)’을 말한다. 그 때문에 당연(當然)은 졸지에 모두가 공인하는 문(門)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시력에 맞춰 쓰는 ‘안경’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이 안경은 저마다의 눈높이와 깜냥에 맞춰지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양을 달리 보이게 하고 상황을 전혀 다르게 읽게 만드는 요상하기 그지없는 물건이다.
길을 가다가 할머니가 너무도 무거운 짐을 들고 힘겹게 지나가고 계시면, 혹은 아이가 뛰어가다가 호되게 넘어져 무릎이 다 까지고 눈물을 흘리며 엄마를 찾으면, 할머니의 짐을 들어드리고 아이를 일으켜 세워 달래주고 엄마를 찾아주는 것은 당연(當然)한 일이다.
그런데, 거기에 내가 너무 바빠 그냥 지나다던가, 이전에 내가 할머니 짐을 들어드렸더니 내가 할머니 물건을 훔쳤다고 모함을 받았다던가 괜히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가 애엄마가 뛰어와서 내가 밀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느냐면서 그저 모른 척하는 것이 가장 낫다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자.
그리 오래지 않은 얼마 전에 서울경찰청의 감찰 수사계의 현직 경찰과 통화를 한 적이 있다. 부정부패를 저지른 비리 경찰에 대해서 고발을 하고 그 부분을 철저하게 수사를 하라고 훈계하며 부탁하고 있는데, 그가 사실관계 확인 중에 말을 자꾸 돌리고 사건을 덮으려는 기미를 대놓고 하며 수사도 들어가기 전에 대답을 기피했다.
워낙 녹취 증거가 명확하게 있다 보니 그 역시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관계에 대해 답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그것을 인정해놓고 나중에 결과로 덮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그를 다그치고 있는데, 그의 입에서 어이가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 사실관계 같은 거 저한테 확인하지 마시고, 그냥 전화 여기서 끊어주시면 제가 제대로 잘 수사해서 명확하게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응?’
어이가 없었다. 감찰 수사계의 경찰이 공정하고 명백하게 수사를 하는 것은 당연(當然)한 그의 책무이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그건 네가 딜의 조건으로 감히 입에 담을 말이 아니잖아!”
뭐 때문에 혼나는지도 못 알아듣고 그저 내 청천벽력의 호령에 놀란 그가 죄송하다며 사과를 했다. 도대체 네가 무엇 때문에 사과를 하는 것이냐고 처음부터 다그치고 가르쳐봐야 알아먹을 머리도 양심도 갖추지 않은 그야말로 경찰청 안에 발에 채이는 대부분의 경찰 중 한 명이었다.
10여 년 전에, 관련 서적의 집필을 해볼까 하여, 조선시대 당쟁과 사화에 대해 사료와 원문을 모두 뒤져 자료를 정리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싸웠고, 어떻게 싸웠고, 누가 싸웠으며, 결론이 어떻게 되었는지 등을 정리하며 아주 속속들이 조선시대의 정치적 싸움을 들여다본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대강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 참상(?)은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저마다 종친회로 힘 좀 쓴다고 위인전에까지 올랐던 그 수많은 인물들이 저마다 당파로 엮여 점잖기는커녕, 너무도 당연한 사실도 저쪽 당파에서 주장하는 것이라면 반대해야 한다고 버젓이 의견을 낸 것이 각 문집과 심지어 실록에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들이 보였다.
현대에 들어와, 지금 빨간당이 여당이었을 때, 냈던 법안조차도 지금의 여당이 파란당이 한다고 하면 무조건 반대를 하는 그 모양은 현대의 그 배지를 단 무뇌충들이 시초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뿌리는 너무도 깊고 견고하고 오래되었던 것을 목도하고 나니 조선시대 이전부터 뿌리 깊게 이어온 그들의 쓰레기 정치 DNA가 일제 강점기 친일파를 거쳐 그 친일파의 자손들이 그대로 잘 먹고 잘 사는 이 이상한 나라의 대한민국에서는 그닥 이상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권을 바꿔야 한다는 절박함에, 그가 검찰총장에 임명된다고 했을 때, 저격수로 나서 쏘았던 그 수많은 총탄을 그대로 상대편에서 가져가서 쓰려고 하니, 그 총탄은 잘못된 불발탄이라고 외치는 코미디를 국회의원이라는 자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의 시전에 다름 아니다.
최소한 일반인들도 이전에 자신이 주장했던 내용을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을 바꾸려면 당황하고 말을 더듬는다. 즉, 이전에 사안이 내가 잘못 알고 이야기한 것이라던가, 최근에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진실은 그것과 다르다는 식의 최소한의 논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거 없다. 아니, 아무런 상관이 없다. 조선시대에도 그랬고, 물론 그 이전 시대에도 그랬겠지만, 체계가 확실하게 잡힌 조선시대의 그 근거 없는 개싸움은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 한복판 여의도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람이 문으로 다니는 것은 저마다의 특성에 따라 다르거나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것을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지만 당신은 문으로 다녀야 한다는 것을 당연(當然) 히 안다. 그런데 갑자기 각자의 사정이 다르고 내 사정이 그러하니 천장을 뚫겠다고 위로 올라가나? 천장으로 다녀야 하거나 창문으로 뛰어나가야 하는 경우는 그 집에 도둑으로 들어온 놈들밖에 없다.
다시 말해, 그들의 특별한 사정이라는 것은, ‘당연(當然)하지 않은 것’에 해당한다. ‘모두의 상식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것은 법의 위에 있어야 한다. 법은 상식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기 애매하거나 다툼의 여지가 있는 것을 규정화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메카라는 미국에도 법률이 버젓이 존재하지만, 배심원제로 판단을 하는 것은 단순히 다수결의 원칙을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당연(當然)을 법 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이제야 겨우 시작된 ‘국민참여재판’은 배심원에 해당하는 이들의 의견을 법관이 참고만 할 뿐, 절대적으로 수용해야 할 사안이 아니라고 못 박고 시작했다. 그렇게 안 하면 법관이 뒷돈을 챙길 영향력을 잃기 때문이다. 기껏 전관을 고용했는데 전관의 힘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예비 법비인 법관들은 이렇게 말한다.
“법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이 법률적인 지식이 부족하여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일반 상식과 법률의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누워서 침 뱉나? 친일파였던 1세대 법관들이라는 것들이 만든, 혹은 친일파 국회의원들에게 발의되어 만들어진 법률이 상식과 유리된 법이라고 점을 셀프 디스 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