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에서는 이른바 고전 문학론에서 가장 기본이 되어 언급되는 개념인 ‘文’과 ‘質’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어렵게 이해하자고 하면 한없이 어려운 개념이지만 쉽게 이해하자고 하면 한 글자씩을 덧붙이고 나면 훨씬 이해가 쉬워진다.
本質(본질)과 文飾(문식)으로 한 글자씩을 덧붙여놓으면, 기본이 되는 본질적인 것과 그 바탕을 꾸미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구분되어 이해가 좀 쉬워진다. 그리고 그 개념들이 강해졌을 때 이루어지는 분위기로 ‘野’와 ‘史’라는 개념이 또 나온다.
주자는 두 개념을 “野는 촌사람이니, 비루하고 소략함을 말한다. 史는 문서를 맡은 사람이니, 견문이 많아 일에는 익숙하나 성실성이 혹 부족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 역시 조금 알아듣기 쉬운 현대어로 설명하자면, ‘野’는 투박하고 꾸미지 않은 날 것의 느낌이고, ‘史’는 많이 꾸미기는 했는데 실속이 없는 형상을 이루는 말이다.
본래 전술한 바와 같이 고전 문장론에서 이 개념이 나오니 문장으로 예를 들면, ‘野’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꺼내놓아 본질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투박하기 그지없고 미사여구도 없고 자세한 설명의 말도 없어 거칠기 그지없는 문장을 말한다. 특히 이 경우는 미적인 부분이 결여되어 문학미를 전혀 살리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史’는 담고자 하는 의미나 본질에 해당하는 내용은 없는데 겉만 꾸며 번지르르해 보일 뿐,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을 지경을 비난할 때 쓰는 말이다. 결국 양 극단으로 가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좋지 않다는 결론은 같다.
혹시 착각할까 봐 다시 주지하건대, 이 장은 문장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개념들이 문장론에서 개념어로 사용되기 때문에 설명할 때 비유한 것뿐이다.
즉, 문장론에 쓴다고는 하지만, 고문(古文)의 특성상 이것은 본질적으로는 모두 인성론에 해당되는 개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문장이든 사람이든 그 두 가지, 즉 본질에 해당하는 본바탕이 잘 갖추어야 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형식적인 면도 무시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환상의 비율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내야 한다. 그것을 이룬 자가 바로 군자(君子)라는 결론이 이 장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주자는 이렇게 이 장의 가르침을 설명한다.
“배우는 자는 마땅히 여유 있는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보충해야 하니, 덕(德)을 이룸에 이른다면 그렇게 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그렇게 됨을 말한 것이다.”
넘치면 덜어내야 하고, 부족하면 보충해야 한다는 것의 목적어와 대명사의 정체가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은 그것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나 그것이 어느 하나로 특정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을 공자가 강조했던 경지에 대한 설명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역시 의미심장한 해설의 방식이다.
넘치는 것을 덜고, 모자란 것을 보충하는 것은 공부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수양하는 과정에서 해야 할 것이나, 결국 그것이 완성되고 나면(여기서의 표현처럼 그것을 ‘덕(德)’이라 하였다.) 무언가를 기필(期必)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기 마련이라는 최종 경지를 설명한다.
양 씨(楊氏)는 조금 더 나아가, 그 균형과 조화를 맞추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공부하고 시도해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시점에서 차선을 제시하며 이렇게 권계 한다.
“文과 質이 서로 이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質이 文을 이김은 오히려 단맛이 조미(調味)를 받을 수 있고 흰색이 채색을 받을 수 있는 것과 같아 괜찮지만, 文이 이겨 質을 없애는데 이른다면 그 근본이 없어지는 것이니, 비록 文이 있은들 장차 어디에다 베풀겠는가? 그렇다면 그 史한 것보다는 차라리 촌스러움이 나은 것이다.”
둘의 미묘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너무 어려워 어느 한쪽으로 불가피하게 갈 경우, 절대 피해야 할 것은 본질을 잃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두 가지 모두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 최상이겠으나 두 가지 중에 어느 하나에 치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본질이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래야 하는 이유도 너무 명확하고 명료하다. 뭔가 꾸미려 하여도 바탕이 없으면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주석에서 인용된 것처럼, 文과 質은 화론(畫論), 즉, 그림으로 비유를 할 때는 質을 바탕이 되는 도화지로, 文을 그림과 채색으로 설명하곤 한다. 물론 단순히 도화지의 재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동양화에서 여백은 단순히 비어있는 종이가 아닌 관계로 그 대상이 되는 이미지가 구체화되기 전의 형태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렇듯 형이상학적인 설명으로 계속 들어가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니 그 정도로 이해해도 초심자에게는 무리가 없을 듯하다.
다시 본문의 내용으로 돌아와 보자.
뒤에 배울, '안연편'에서 극자성(棘子成)
이 지금 당신이 할 질문을 던진다. 결국 본질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 文(꾸밈)이 뭐가 중요하냐고, 반문한다.
이에 자공이 스승을 대신하여 그에게 결국 文과 質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는 설명을 한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 공부할 때 더 상세히 다루기로 하고, 文과 質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하나 소홀히 버려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예로 많이 제시되는 것이 앞에서도 공부했던 제사이다. 제사를 지내는 돌아가신 분을 기리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제수음식이라던가 경건하게 시간에 맞춰 격식에 맞춰 제사를 지내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미 그 文(꾸밈)에 본질(本質)이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공경하는 마음이 없는데 영혼 없이 비싸고 좋은 제수음식에 화려한 제사상만 꾸미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시어머니가 시키니까 힘들어 죽겠는데 그냥 종갓집 며느리라는 십자가를 멘 심정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느냐고 멍청한 우문을 던질 수 있겠다. 그래서 시작은 본질이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부모님의 제사를 모시는 것이라면, 생전에 좋아하셨던 음식을 고르면서도 마음이 경건할 것이고 살아계실 때보다 더 극진하게 모시고 싶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제수음식을 고르고 더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자 하는 것은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아이를 키울 때, 아이가 티 없이 맑고 스트레스받지 않고 바른 성정을 가진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는 부모의 바람과 남보다 공부도 잘하고 성적이 훌륭하여 좋은 대학에 가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부모의 욕망은 유리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남들을 앞서겠다고 학원을 보내고 남을 밟아야 이긴다는 교육을 받으면서 티 없이 말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은 현실적으로 모순에 부딪힌다.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그래서 군자가 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이 장의 마지막에 두 가지 모두가 빛이 나며 균형과 조화를 갖춘 사람이야말로 군자라고 한 것은 그것이 얼마나 이르기 어려운 것인지 알기에 지향점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이나 그렇지 못한 이, 모두 국민이다. 그렇다면 위정자는 누구를 위한 정치를 펼쳐야 하는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있는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서 나눠주는 것은 위정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여기서 본질은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것이기는 하지만, 모두가 잘 산다는 것이 더 노력해서 스스로 많이 얻은 자의 것을 빼앗아서 그만큼 노력하지 못해서 많이 갖지 못한 이들에게 줌으로써 균형을 맞추는 것은 공산주의나 집단주의에 다름 아니다. 정의는 그렇게 억지로 실현되지 않는다.
빈부격차나 세대 간 격차 혹은 이념 간 격차는 자신들만의 입장만을 생각하고 자신들만의 이익과 상황을 주장하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다. 가진 자들의 것을 덜어내어 부족한 자들에게 주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하였다.
제대로 정의가 구현되려면, 정당하게 노력하여 자신의 것을 늘이는 이들의 것을 빼앗아 노력하지 않고 정부를 탓하며 더더 달라고 징징거리는 자들의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는 것이 아니다. 노력하지 않고 다른 이의 것을 나눠달라고 하는 자들이 부끄러워하는 사회를 만들면 된다. 정당한 방법이 아닌, 적당히 편을 먹고, 불의를 눈감아주는 것으로 이익을 공유하는 것들을 법과 상식에 맞게 규제하고 불법적이고 부당한 것을 걸러내면 된다. 본래 법을 다루는 검찰과 법원이 하는 일이 그러한 것이다.
그래야 하는 이들이 자기 배 불리고 자기 식구들 배불리겠다고 더 많이 가진 자들의 불의를 부정을 눈감아주고 그 콩고물을 나눠가지면서 사회가 분열되었고, 빈부격차가 커진 것이다. 도리어 안 먹고 안 쓰고 자신의 노력으로 한 땀 한 땀 모은 재산을 가진 이에게 당신이 더 많이 가졌으니 그렇지 않은 자에게 나눠주라는 식이 포퓰리즘을 만드는 것이다.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치부하고, 지금 있는 자리가 힘이랍시고 그것을 이용하여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하고, 그것이 관행이었다면서 뒤로 찌질한 능력 안 되는 자식들에게 엄마 찬스 아빠 찬스 쓰게 하는 그것들에게 부정한 방법으로 챙긴 것만 털어내어도 포퓰리즘 소리 듣지 않고 사회를 정화시킬 수 있다.
더 노력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나랏님만 탓하고, 왜 내게 공돈이 더 많이 안 오냐고 징징거리는 국민들에게 일일이 돈을 퍼주는 것은 정의도 복지도 뭣도 아니다. 어디서 나오는 돈인지도 모르면서 용돈이랍시고 뒷돈 받고 광화문에 나와 뜻 모를 구호를 따라 외치고, 유튜브를 중계하는 것들에게 손뼉 치고, 오래된 낡은 군복 입고 나와 다 얼어 죽은 빨갱이가 어쩌고 떠드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짓거리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려면 매서운 회초리 같은 정의가 정말로 뭔지 보여줄 필요가 있다.
당신 혼자서는 세상을 바꿀 수도,세상이 바뀔 리도 없다. 하지만, 본래 정치의 특성상,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모이고, 그것이 중론(衆論)이 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그것이 정치꾼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여론(與論), 즉 함께하는 이들의 같은 목소리이다.
당신은 정말로 옳은 길을 택하고 싶기는 한 건가? 군자가 정말로 당신의 지향점인가?
적당히 눈먼 돈이나 줄 잘 잡아서 능력에도 맞지 않는 승진이나 어딘가에 꽂혀 강남에 아파트 한 채 사게 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