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정직하니, 정직하지 않으면서도 생존하는 것은 (죽음을) 요행히 벗어난 것이다.”
이 장은 문법적으로 해석이 조금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진 장이다. 그래서 해석이 매끄럽게 되지 않는다고들도 한다. 일반적인 고문법의 구조로 보면 늘 하던 대구(對句)로 보면 되는데 그 형태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딱 떨어지는 대구가 아니다.
게다가 ‘罔’이라는 글자는 새로운 의미로 쓰여, ‘直’의 반대말, ‘정직하지 않다’로 쓰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문장은 대구로 해석하는 문장이 아니라, 문법적으로는 연쇄적으로 받되, 의미를 대구로 환치해야 한다. ‘人之生’과 ‘罔之生’이 문법적으로 대구가 되지 않는데, 자꾸 기초적인 대구로 끼워 맞춰 해석하려 하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새로운 시도를 한 주석에서는, 앞의 것을 인간 본연의 태어나자마자의 삶으로 보고 성선설의 입장에서 사람의 본성은 정직한데, ‘罔’을, 사람이 자라면서 정직한 천성을 굽혀버려서 오염시켰다는 것으로 해석하여, 그렇게 ‘본성이던 정직함을 구부리는 삶은 죽어야 하는데 요행히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 점을 염두해서 다시 꼼꼼히 주석을 살펴보자. 정자(伊川)는 이 장을 이렇게 해석한다.
“사람이 사는 이치는 본래 정직하니, 罔은 정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생존함은 요행히 면한 것일 뿐이다.”
문법적인 해석의 차이는 있으나, 앞서 원문을 해석한 것처럼 정직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는 조금은 섬찟한 강한 경고에 다름 아니다.
앞서 등장했던 인물들이 엮인 사건을 떠올리면 이 조금은 이해하기 복잡한 이야기를 이해라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공자가 위나라 영공의 부인(夫人)인 요녀(妖女)라고 불린 남자(南子)와 만나는 이야기를 배경으로 삼아 본다.
공자는 위(衛) 나라에서 안탁추의 집에 10여 개월을 머무르다가 진(陳) 나라로 가기 위해 위(衛) 나라를 떠나는데, 광(匡)이라는 땅에서 ‘양호(陽虎)’라는 자로 오해받아 붙잡혀 5일간 구류당하고서 풀려나 다시 위나라로 돌아와 거백옥(遽伯玉)의 집에 머무르면서 거백옥의 집을 드나들던 (앞서 살펴보았던 그 잘생겼다던) 송조(宋朝)의 중개로 영공의 부인(夫人)인 남자(南子)와 교류하게 된다.
영화 <공자>중에서 공자와 남자의 만남
그러자 세간에서는 둘 사이에 대한 이상한 소문들이 들려오고, 다혈질 제자, 자로(子路)는 스승인 공자와 남자(南子)의 만남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스승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이에, 공자는 ‘나는 떳떳하지 않은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그랬다면 하늘이 나를 미워할 것이다.’라는 말로 자로(子路)에게 설명하여 소문을 일축한다.
만약 이 상황에서 위 장이 설명된 것이라 가정해보면, 정직이라는 것은 본래 가지고 있는 선함이고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후천적으로 세상의 때가 탔던 스스로 굽혔던 그것이 없어지게 된다면, 그 정직함이 없이 사는 삶이란 요행히 죽음을 면한 삶에 불과하다는 강한 부정의 뜻, 되시겠다.
정직하라는 말은 지극히 도덕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지금의 사람들에게 이 원론을 강조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정직하고 곧이곧이로만 살아갈 수 있느냐고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요령이 없는 사람이라고, 고지식하여 세상 살기 어려울 것이라는 주제넘은 조언을 서슴지 않으면 던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슬기로운 사회생활에는 곧은 것을 적당히 굽히고 휘어가며 유연성 있게 바꿔야 하는가? 이 장에서의 가르침은 그것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강하게 강조하는 것이다.
요행히 죽음을 면했다는 말은 지극히 완곡하게 표현한 것으로 풀어서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정직하게 살지 않는다면, 지금 그 자리에서 벼락을 맞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하늘에 죄를 짓는 일이라는 강한 어조의 경고이자 강조인 셈이다.
거짓말이 안 좋은 것은 모두 안다.
왜냐하면 자식을 키우는 입장의 부모가 되어서 아이가 거짓말을 했을 때, 잘했다고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거짓말을 훈련해야 한다고 칭찬하며 가르치는 부모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정직하라고 가르친다.
그것이 옳기 때문이라던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라던가의 차원이 아니라 당위이고 사람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자식을 그렇게 가르친다. 그런데 아까 세상을 살려면, 사회생활을 원활하게 하려면 정직만 찾아서는 안된다고 말한 그 사람이 집에 가서 자기 자식에게는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인가?
거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채를, 일수를 쓰게 하고 고리대금업을 하는 양아치가 자기 자식이 남의 돈을 쓴다고 하면 눈이 온통 흰자로 바뀌어 정신 나갔냐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기는 그것으로 돈을 벌면서 그러지 말라는 옆으로 걷는 엄마게의 논리가 구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잘못된 것이고 옳지 않은 것이라면서 사회생활을 원활하게 하려면 그래야 한다고 옆의 상관없는 친구에게는 주제넘어 보이는 조언까지 아끼지 않던 그가 왜 자기 자식에게는 그렇지 말라고 하는가?
여기서 공자의 논리는 하나이다. 내 자식에게 하지 말라고 하는 건, 내 친구에게도 지나가던 사람에게도 그러지 말라고 하는 것이 맞다. 살아감에 있어 논리를 하나여야지 그것이 이때는 이래서 다르고, 저때는 저래서 다르다는 식으로 왔다갔다하는 것은 사람됨의 기본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원천적인 내로남불 따위를 금하는 기본 원리인 것이다.
국운이 걸린 큰 전쟁을 한다 치자. 당신이 사령관이라면 상대의 군대가 부족한 것을 탓할 것인가? 아니면 당신의 부대가 잘못됨을 탓할 것인가? 상대의 군대가 부족한 것은 내가 탓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공격하여 성과를 올리면 된다.
싸우기 전에 전열을 정비하고 어떻게 싸울지를 준비할 때 우리 군대가 군기가 빠지고 전쟁을 앞두고 아군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뻘짓을 하거나 자살행위를 하는 이들을 먼저 정리하고 그래도 정신 못 차리는 이가 있으면 엄격한 군율로 다스리는 것이 맞다. 상대 군대가 잘못된 것을 내가 고쳐줄 것도 아니고 그것은 연구만 하고 분석해뒀다가 실제 전투에서 그 부분을 공격하여 일격에 박멸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자신이 정직하지 않은 것을 고칠 생각은 안 하고, 정작 집에 가서 자기 아이에게는 정직하라고 거짓말했다고 손들고 있으라고 하고 혼내면서, 자기 옆의 친구에게 혹은 후배에게 노련한 사회생활 선배인 양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으면서 사회가 정직한 것만으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적당히 유연성을 가지라며, ‘마음에 없는 소리도 좀 하고, 다른 동료들이 뒷돈 받고 해 먹을 때, 적당히 나눠주니까 너도 그거 먹고 그냥 좀 서로서로 도와가며 사는 거다.’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 조직이,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잘못된 것, 느슨한 것, 삐뚤어진 것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 왜 갑자기 같이 느슨해지자고 그것이 원활한 사회생활이라고 공범을 만드는 의식을 치르냐는 말이다.
법조게이트로 불렸던 정운호 사건
최근 대장동을 털겠다고 했다가 대규모 대한민국 법비 게이트가 드러날 판이다. 관련되어 있는 이들이 현역 검찰들의 바로 윗 선배들인지라 한 놈도 아니고 그 콘체른을 모두 칼을 댔다가는 환부를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일도양단하게 될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환부가 온몸에 퍼져 환부만 돌려낼 수 없다고, 메스를 손에 잡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살라고 두나?
공자가 이 장에서 말한, 요행히 살아 있다는 것은 정확하게 바로 그 상태를 의미한다. 저 마다 배우는 개개인도 정직함을 유지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가 있을 때, 조직에서 정직을 손상시키고 좀먹고 썩게 하는 자가 있을 때, 그것을 빨리 바로 고쳐야만 환부를 도려내든 치료를 하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와 동조해서 유연하고 원활한 사회생활을 한다는 명분 하에 공범이 되는 것은 결코 슬기롭지 못한 처사이고 그렇게 해서 환부가 온몸에 퍼져버리게 되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고, 제대로 살아 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살아서 지옥에 있던 두 전직 대통령은 진짜로 지옥에 갔고, 아직 죽지 못해 사람이 만든 지옥 같은 감옥에서 호텔 같은 생활이 불편하다며 갇혀 있는 두 전직 대통령들은 정직하지 못하고 적당히 감추고 서로 감춰주는 것이 자신의 정직하지 못함을 상대가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아킬레스 건이라 믿고 서로를 견제하다가 국민들에게 만천하에 그 올곧지 못함이 드러나서 그 꼴에 된 것이다.
한국말에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있다.
시한부 인생도 아니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 불안감에 사는 것은 산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정직하지 않은 삶이 그러하다고 이 장을 통해 공자가 가르쳐주고 있지 않은가? 당신에게 정직은 무엇인가? 거짓말하지 않는 것? 솔직하게 모두 말하는 것? 그것은 유치원에서 정의하는 정직이다.
진정한 정직은,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인정받는 것이다. 뒤에 인정받는 것에 방점을 두는 이유는, 내가 아무리 옳은 것을 옳다고 하여도 나만 옳다고 여기는 것은 우기는 것이고, 그 정직은 상대적인 개념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아도 말할 수 없고, 말해도 그렇다는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도 그렇고 그 사회도 그렇고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부도 명예도 권력도 건강하게 살아 있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그래서 이 장에서 가장 강한 강조로, 운이 좋아 겨우 연명하는 것이지 그러다가 곧 죽는다.라고 무섭게, 하지만 과장이 아닌 아주 사실적인 경고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