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직접 하지 않는 것은 즐기는 것이 아니다.

프리미어리그를 보는 것과 조기축구회를 나가는 것의 차이.

by 발검무적
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道를 아는 자가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가 즐거워하는 자만 못하다.”

<논어>를 읽어 보지 않은 이들이라도 어디선가 들어서 잘 알고 있는 문구들 중에 대표적인 내용이 바로 이 장의 내용이다. 그런데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해석과 위의 내가 해석한 부분이 아주 큰 차이가 한 가지 있다. 무엇인지 발견하였는가?


이 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知之’와 ‘好之’, ‘樂之’에서 나오는 지시대명사 ‘之’에 대해 원문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지시대명사는 언어학적 구조상 당연히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내용이 앞에 있고 나서 나와야 하는데, 이 장에서는 그것이 빠져 있다.


다시 말해, 무엇을 알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즐기는지, 목적어가 이 문면에 공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원문에는 그것이 바로 ‘道’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넣었다. 일반인들이 이 장을 언급하면서 지식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오해하게 된 이유는 세 부류의 사람을 등급별로 비교하는 것 같은 식의 설명을 하여 세 부류의 사람을 두고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문의 문법적 특성상 ‘不如’라는 표현이 비교이기 때문에 세 부류가 누가 더 나은지에 대해 비교한 것은 맞다. 하지만, 여기에서 오해의 여지가 발생한다. 빨리 알고 싶어 하는 성격 급한 이들이 많을 테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건 세 부류를 비교한 것이 아니라 배우는 자의 3단계를 비교한 것이다. 즉, 대상이 그것을 성취한 사람이 아니라 3단계로 지향해야 할 바를 설명하기 위해 그런 비유를 한 것이다.

공자가 늘 말한 것에 대한 것은 ‘仁’도 있는데, 왜 ‘道’라고 한 것인지 알겠는가?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 목적어에 해당하는 것은 여러 가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仁’으로 국한하게 되면 다른 범위로 확장이 불가하다.


그런데 ‘道’가 목적어가 되면 지평의 확대가 원활해진다. 인간으로서 도달해야 하는 경지의 ‘道’, 배움에 있어서 달성해야 할 ‘道’, 완성된 경지를 이르는 단어인 ‘道’로 개념의 확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씨(尹氏)는 이 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안다는 것은 이 道가 있음을 아는 것이요, 좋아한다는 것은 좋아하되 아직 얻지는 못한 것이요, 즐거워한다는 것은 얻음이 있어 즐거워하는 것이다.”

앞서 원문에서 목적어를 ‘道’라고 해석한 내용에 대해서 이 주석에서 윤씨(尹氏)도 ‘이 道(此道)’라고 설명하며 눈깔자로 핵심을 찍는다. 여기서 사용된 지시대명사는 앞에서 공부한 ‘강조’를 위한 지시대명사이다. 그리고 분리해서 세 사람의 부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순서에 맞춰 경지를 올라가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 당신만 모르고 현대의 주석서에 적어놓은 어설프게 공부한 이들만 모르고 선배들 시대에는 모두 알고 있었던 ‘상식’에 해당한 것이다.

그 수순을 조금 자세히 들어가보자.


안다고 하는 것은 현대의 해석처럼 그것에 대한 지식을 안다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러한 경지에 해당하는 ‘이 道(此道)’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뜻이 아니다. 그다음 단계로 ‘좋아한다’는 의미는 그것이 있는 줄 알았으니, 무엇인지를 알아야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음 다음에야 그것이 좋은 것인지를 파악할 테니 좋은 것이라면 사람들이 모두 얻고 싶어 할 것인데, 아직 그 단계는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그것의 본질을 알다는 것이 좋아한다는 의미로 치환된 것이어서 앞서 안다는 것과 구분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무엇을 즐기는가? 그 목적 행위를 하는 것을 즐긴다고 착각하는 현대의 해석이 아닌, 앞서 언급했던 ‘이 道(此道)’를 얻은 상태를 의미한다. 즉, 그렇게 좋은 것을 이미 얻어 그 경지에 올랐으니 아니 즐거울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본래 이 장의 실질적인 의미이다. 혹시나 배우는 자들이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했을까 싶어 장경부(張敬夫)가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설명한다.

“오곡(五穀)에 비유한다면 아는 자는 그것이 먹을 수 있음을 아는 자이고, 좋아하는 자는 먹고서 좋아하는 자이고, 즐거워하는 자는 좋아하여 배불리 먹은 자이다. 알기만 하고 좋아하지 못하면 이는 앎이 지극하지 못한 것이요, 좋아하기만 하고 즐거워함에 미치지 못한다면, 이는 좋아함이 지극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옛날 배우는 자들이 스스로 힘써 쉬지 않았던 이유일 것이다.”

이 해설을 통해, 결국 배우는 자들이 어떤 단계를 통해서 그 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해준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공부하며 실례로 익혔던 공자의 일화를 통해 즐기는 자의 경지를 알아보기도 하자.

노소공(魯昭公) 25년에 삼환(三桓)의 난으로 공자가 제(齊) 나라로 망명했을 때, 당시에 공자는 약 35세 정도의 나이였고, 제(齊) 나라의 태사로부터 순(舜) 임금의 악(樂)인 소(韶)를 배우게 되는데,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모를 정도로 몰입하여 배웠다고 하는 내용에 대해 앞서 공부한 바 있다.(기억이 났길 바란다. 배웠던 내용을 또 보면서 매번 새로우면 곤란하다.)


고기 맛을 몰랐다는 것은 강조의 용법으로 고기가 어떤 맛인지를 잊어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먹는 기본적인 행위에 관심이 없을 정도로 몰입하였음을 의미한다.


처음에 공자가 소(韶)를 배우게 된 것은, 소(韶)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것이 도통(道統)을 이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좋아하게 되고, 또 배우고 익히며 그 속뜻까지 이해하고 나니 순(舜) 임금의 그 음악을 만들고 연주했던 당시 마음까지 읽어낼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즐기게 되었다는 과정까지 거치게 된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즐긴다는 것의 형태에 대해 사람들이 아직도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것을 얻어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는 의미가 즐긴다는 뜻이 아님에도 오해를 할까 싶어 궁극의 단계가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 약간 부연하고자 한다.


이 장의 가르침이 갖는 원리는, 앞서 말했던 모든 세상 원리에 배우는 자들에게 적용된다. 돈을 벌고 싶은 자들에게 있어도 그렇고, 진정한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배우는 자들에게도 적용된다.


아침마다 출근 전에 발행되는 이 <논어 읽기>를 당신은 왜 매일 함께 공부하는가?


인성 공부를 하고 인문학 공부를 하고 아니면 그저 한자 공부를 하고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공통점은 이 공부가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에 있다. 자신을 위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부러 이 어려운 한자를 읽고 어려운 담론을 읽고 게다가 이 까칠한 가르침의 회초리를 읽는 것이 아침부터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그리고 매일 그렇게 공부해서 모르는 한자를 배우고, 수천 년 전 공자가 일러준 사람이 가야 할 도를 깨닫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하나하나 알게 되면서 자신이 모르고 있던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알게 된다는 것 역시 중요할 것이다.

그다음은? 그것이 좋아지는 것이다. 한참 늘어난 체중과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를 매일 같이 단련하기 시작하면, 그렇게 내 몸을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러면 일종의 운동 중독이라는 것이 되어 운동을 하지 않으면 몸이 찌뿌둥해지고 영 피로가 풀리지 않아, 자연스럽게 술을 끊게 되고 매일 운동을 하게 되며 중량을 늘려 자신의 한계를 조금씩 높여가고 확장시켜가게 된다.


<논어> 공부를 하면서 그렇게 배우는 즐거움과 깨닫고 조금씩 수양을 하게 되면 그다음 단계를 이행하게 된다. 아무도 배운 대로 이행하라고 시키지 않지만, 수양이 되는 공부는, 제대로 된 인문학은 배운 것과 행동이 일치하게 된다. 아무도 당신을 감시하고 지켜보고 있지 않더라도 당신의 옷깃을 바르게 여미고 행동 하나하나를 삼가게 된다. 왜? 그렇게 배우고 익혔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른 공부의 종착점이다.


‘실천’. 맞다. 내가 즐기는 것의 단계를 부연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 일러주려 하였던 배우는 자들에 궁극적으로 공자가 바랬던 것이 담겨 있다.


축구를 좋아하는 이가, 축구의 원리를 알고, 좋아하는 축구선수가 생기고 응원하는 축구팀이 생기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가는 것이 자신이 그 플레이를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물론 조기 축구회에 가서 제대로 공을 발에 맞추는 것도 못하면서 눈만 프리미어리그에 가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축구를 좋아하면 손흥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몸에 새겨도 제대로 알고 새기자.

그것을 서툴지만 자신의 몸으로 직접 뛰며 경험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그 기술들이, 그 동작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깨닫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땀을 흘리며 공을 내가 차는 것만으로도 축구를 훨씬 더 다양하고 깊이 있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즐긴다는 것이 최종경지이기 때문에 프로급으로 잘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초심자가 있을 듯하여 이 설명을 곁들인다. 즐긴다는 것이 단순히 실력이 프로급인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예컨대 같은 프로들 중에서도 돈을 벌기 위해, 혹은 어쩔 수 없어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결코 입신(入神)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 잘 못하는 것을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힘들고 지난한 일이다. 모르는 한자를 찾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제2외국어급에 해당하는 한문(漢文)으로 적힌 고문(古文)을 공부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고, 한 번에 될 리가 없다.

인문학이 과학과 다른 것은 단순히 지식을 탑재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수세대에 걸친 학문의 행간에 있는 축적된 경험이 내 삶에 함께 융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나 수학자는 나이가 들면 그의 지식이 한창 현역에서 뛰고 있는 자들을 이길 수 없고, 최신의 정보를 업데이트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뒤처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문학은 그렇지 않다.


수세기에 걸쳐 쌓여온 것을 인간이라는 한정된 존재가 지속적으로 차곡차곡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 가는 것이기에 그 경험치가 쌓이면 쌓일수록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단순 암기나 많은 책을 읽는 것만으로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것을 경험하고 계승해보았던 공자였기에 이 모든 것을 이 한 마디의 가르침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어떤 분야에 있던 어떤 것을 공부하던 어떤 분야에서 정점에 오르고 싶던 이 가르침은 당신의 마음가짐을 다잡는 데 있어 무엇이 가장 필수가 되어야 하는지, 당신이 어떻게 그 지향점을 향해가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가볍게 그저 문자만을 해석한 현대의 해설서를 통해 읽었던 것처럼, ‘내가 그것을 좋아해서 하고 그것을 즐겁게 하면 된다는 뜻 아닌가?’ 하는 어설픈 잘못된 해석에서 오늘부터 벗어났으니 당신이 나아가는 길을 바라보는 안목도 조금은 달라졌기를 바란다.


그 도를 얻고 나서 그 경지에 오르고 나서 자연스럽게 즐거워할 당신의 모습을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