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중등 인물[中人] 以上은 높은 것을 말해줄 수 있으나, 중등 인물 이하는 높은 것을 말해 줄 수 없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케이스 바이 케이스의 방식으로 맞춤형 교육을 했다는 사실은 누차 그간 논어 공부를 하면서 확인한 바가 있다. 그것은 공자의 시그니처처럼 되어버렸지만, 결코 공자의 습관 같은 것이 아니다. 수차례 공부와 수양을 통해 자신이 얻어낸 최상의 교육법에 다름 아니다. 아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어보더라도 그것을 물어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상황이 어떠한지에 따라 그의 대답은 늘 달라고, 비유도 달랐다.
그 이유는 다각적이었다.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눈높이 교육이라는 기본적인 출발에서부터, 그의 성향이나 그가 평상시 어떻게 공부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야기를 해줘야만 그가 그의 부족함을 채우고 바로 그 뜻을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모든 것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그것에 대해 맞춤으로 적확하게 집어주는 방식이었다.
이 장은 그러한 공자의 교육철학의 깊이 있는 한 단면을 보여주는 말이다. 자신의 교육 방식을 자랑하거나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자들이, 인간들이 모두 똑같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불가피하게 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냉정한 인간 관찰의 결과이기도 하다. 아울러 그 안에 감춰진 연구결과도 담겨 있는 가르침, 되시겠다.
그렇다면 주자가 이 장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語는 말해주는 것이다.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마땅히 상대방의 높고 낮음에 따라 말해주어야 함을 말씀한 것이니, 이렇게 한다면 그 말이 들어가기가 쉬워 등급을 뛰어넘는 폐단이 없을 것이다.”
고문에서, '말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는 무수히 많다. 예컨대, 가장 많이 나오는 說부터 시작해서 告, 言, 爲 등등 많은 단어들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 고문을 깊이 공부하여 레벨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그 단어들의 미묘한 뉘앙스가 갖는 차이가 발생하고 그것을 언제 어떻게 써야 하는지가 각기 모두 달라진다.
그것이 고문만이 갖는 깊이와 묘미라 하겠다. 여기서 語의 용법이 그렇다. 당신이 알고 있는 한자의 뜻처럼 그냥 ‘말’이라는 의미로도 물론 사용되지만, 익숙하게 보아오지 않은 명사가 여기서 툭 튀어나오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게 쓰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語가 갖는 의미는 ‘가르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내내 <논어>를 읽으면서도 그저 ‘말씀’ 정도로 이해했던 그 흔한 語가 갖는 저 깊은 곳의 본래의 의미, 되시겠다.
이 주석에서는 전에 공부하면서 몇 번 언급하고 기억해둬야 할 유학에서의 금기 ‘엽등(躐等)’이라는 개념어도 나온다. 잠시 기억을 상기하자면, 이 단어는 유학에서 가장 삼가야 할 금기 중의 하나로, 자신의 깜냥이 그 정도가 되지도 않으면서 수준에 맞게 순서에 맞게 오르지 않고 가랑이를 찢어가며 위로 튀어 오르려는 참람된 행동을 가리킨다.
물론 그것을 행하는 주체가 무지하고 어리석기 그지없어 욕을 먹는 것이긴 하지만, 이 주석에 의하면 그것조차도 가르치는 사람이 그의 수준에 맞게 가르침을 주기만 한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엽등(躐等)’을 할 정도로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자는, 스승이 주는 것만을 따를 테니 제대로 순서를 정하여 그렇게 따르라고 밀착 지도를 하면 최소한 ‘엽등(躐等)’을 할 겨를이나 여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 장에서 ‘中人’이라 표기한 단어가 갖는 의미와 용법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원문에 내가 해석한 것처럼 이것은 사회적 신분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인간의 능력치를 나눴을 때 그 중간치가 되는 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장을 보면 중인 이상과 중인 이하라고 하여 중인을 기준으로 두 번 언급하면서 그 위와 아래를 말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특별할 것이 없는 너무도 당연한 말로 보인다. 당연하고 짧은 것 같으면? 맞다. 만만한 문장이 아니니 꼼꼼히 다시 보라 여러 번 일러 주었다. 어미의 처리를 잘 보면, 중등 이상의 레벨이 되는 자에게는 가르침을 ‘줄 수 있’으나, 중등 이하의 인물에게는 가르침을 ‘줄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게 가르치라고 방식을 제시하며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팩트를 설명하고 현상을 분석한 것을 제시하는 형태의 어미를 사용하였다.
즉, 이것은 공자의 견해가 아니라 공자가 관찰하고 분석한 사실이고 진리라는 은연 중의 표현이자 강조이다. 누구는 이렇게 해도 되고 누구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행간을 읽어낸 장경부(張敬夫)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을 풀이한다.
“성인의 도는 정밀과 거침이 비록 두 이치가 없으나, 다만 그 가르침을 베풂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재질에 따라 집중적으로 한다. 중등 이하의 자질을 가진 자에게 갑자기 너무 높은 것을 말해주면, 그 말이 제대로 들어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장차 망령 된 뜻으로 등급을 뛰어넘어 몸에 절실하지 못한 폐단이 있어서 또한 낮은 것에 그치고 말 뿐이다. 그러므로 그 따라갈 수 있는 바에 나아가 말해주어야 하니, 이것이 바로 묻기를 간절히 하고 생각을 가까이하여 점차 높고 먼 데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장경부(張敬夫)의 주석이 늘 그렇듯이 <논어>를 읽으며 배우는 자들을 위한 가이드를 제시해주는 것임을 단락의 마지막 문장을 통해 알 수 있다. 가르치는 이의 분석을 해놓은 이 장의 행간을 제대로 읽어, 그 가르침에 제대로 따르기 위해서는 묻기를 간절히 하여 자신이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를 묻고, ‘생각을 가까이하여’ 좀 더 높은 곳으로 순차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중요한 핵심 포인트를 다시 한번 화두로 던져준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공자에게 같은 개념인데도 여러 제자들이 묻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정말로 몰라서 때로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받고 싶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질문을 한다. 스승의 입장에서 보면, 질문은 그 학생을 파악하는데 아주 요긴한 세부 데이터에 다름 아니다.
그가 어디까지 어떻게 어떤 식으로 이해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어떤 것인지 그 모든 것을 읽어낼 수 있는 해답이 질문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질문조차 하지 않으면 그가 정말로 이해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혼날까 봐 가만히 있는 것인지,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이미 곱씹고 있는지 스승은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공자는, 직접 제자가 평상시에 하는 언행까지 관찰하기 위해 몰래 그를 관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제 이 장에 감춰진 또 하나의, 中人의 용법의 비밀에 대해 살펴보자. ‘中人’이라는 단어가 중등 이상과 중등 이하로 나뉘어 두 가지로 설명되어 있고, 뭐 특별한 것 없어 보인다. 응, 아니다. 특별한 행간을 가지고 있다. 굳이 ‘中人’이라는 단어를 두 번 사용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은 것은 그것이 중간에 해당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中人’에 해당하는 이들은 위로도 아래로도 얼마든지 갈 수 있다는 가능성과 권계를 한꺼번에 담고 있는 용법이다. 다시 말해, 가르치는 사람은 그렇게 알아들을 수 있는 눈높이에 맞춰 가르쳐야 하는 것인데, 배우는 자는 자신이 속하는 레벨을 얼마든지 노력에 따라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줌과 동시에, 언제라도 공부를 게을리하고 수양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중등 이하의 나락을 떨어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권계 하는 심오한 가르침을, 아는 이들만 알아차리도록 배치한 수법이다.
이 장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것을 이해한 中人이상의 상위 수준의 이라면 이것을 열심히 배우고 익혀 실천하려 노력할 것이고, 中人정도 되는 이는 이게 맞는 것인지 정확하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신반의의 아리송한 모습을 지을 것이다. 가장 낮은 中人이하의 이해도가 떨어지는 이는 이 가르침을 읽고서도 피식 웃으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며 귀중한 가르침을 흘려버릴 것이다.
그저 말만 잘하는 사람과 그것을 실천궁행한 사람의 차이는 그가 번지르르하게 준비한 이야기만을 떠는 것인지 상대에 따라 어떻게 대화나 단어의 사용과 응용이 달라지는지를 보고서 판단할 수 있다. 같은 개념을 설명한답시고 준비한 것을 달달 외운 학자는 유치원생에게 그것을 알려줄 때와 대학생에게 그것을 알려줄 때의 차이를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해한다.
그나마 준비한 원고를 그대로 읽는 수준이 아니라 당황해하기라도 하면 그나마 낫겠다. 그래서 준비가 되지 않은 자는 기자회견이나 토론을 꺼리게 된다. 그것은 임기응변의 수준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은 물론이고 인생을 공부한 수준과 세상을 보는 공부로 갖추게 된 안목의 높이를 여지없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토론 시뮬레이션 리허설로 커버하거나 갑자기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미크론'이라는 새로운 변이가 나오고, 사람들은 다시 경악했다. 그런데 그것이 치사율이 이전 델타 변이라는 녀석보다 높지 않다는 이야기가 솔솔 나오면서 사람들은 ‘어휴!’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고, 유럽에서 자유를 표방한다고 하면서 백신의 의무화를 거부하는 데모를 하는 이들의 양상이 더욱 거세졌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생각했을 때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지의 유럽인들은 우리보다 더 합리적이고 뭔가 더 배웠을 것 같고 민주주의에서도 앞서 있으니 그런 모습을 보일 거라 막연히 생각한다. 아니다. 나중에 외신 뉴스에 나오면 그들의 면면을 자세히 보고 관찰해보라. 그들이 뭔가 자신들만의 철학이 옹고해서 그 데모를 하는 것이 아님을 쉽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남아프리카발 오미크론이라는 변이가 치사율이 높은지 아닌지는 '지금'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생각건대 치사율이 90% 정도 올라가면 백신을 맞지 않겠다고 데모를 하는 것은 고사하고 저마다 달려가서 자기 먼저 살려달라고 백신을 구걸할 이들이 바로 그 데모를 하는 이들이다. 물론 정부나 백신과 연관되어 보이지 않는 콘체른과 그들이 폭리를 취하며 배를 불린다거나 또 다른 음모이론이 전혀 허황된 이야기라는 것이라 치부하는 것은 아직 이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조금이라도 의학 전문지식을 갖춘 자들이라면, 변이 바이러스는 사람을 여럿 거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변이를 만들어내고 언제 더 높은 치사율과 어마어마한 감염률을 갖추고 등장할지 모른다는 살아 움직이는 변이 배양 창고를 마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정치적인 이유로 확진자와 사망자 수를 줄여서 보고하여, 전 세계에 ‘일본 미스터리’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는 일본의 현상황에 대해 그것이 사실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집단 자연면역체계가 생긴 것이라며 헛소리를 하는 의료인이라는 작자가 나오는 것이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이 너무도 어이없고 그 중등 이하의 인간에게 얼른 일본 한복판으로 이민 갈 것을 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늘 말하지만 너튜브같은 공인되지 못한 정보, 특히나 어그로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으로 자신의 수익을 창출하는 것들에게 휘둘려가는 상황이 만연한 경우, 中人이하의 사람들은 아주 쉽게 그들에게 스피커로 포획된다.
정치꾼들이 하던 기존의 다양한 수법들이 너튜브에서는 학습되고 전승되며 시연되고 있다. 이미 그들의 사상누각과도 같은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을 이들은 그들의 화면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들의 목표 또한 中人이상의, 자신들의 치부를 한눈에 꿰뚫어 볼 이들을 구독자로 삼기를 기피한다. 그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얄팍한 거짓말과 선동 방식을 깨부수고 민낯을 저격할까 피해 다니기 급급하다.
자아, 당신은 中人이상으로 가고자 하는가? 中人이하로 떨어지길 원하는가?
가르침은 언제나 다양하게 당신의 눈높이에 준비되어 있다. 당신의 눈높이에 맞춰 가르쳐줄 수준 높고 상냥한 스승이 어디에나 널려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은 그러한 스승을 찾아 제대로 된 배움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그 정도의 지각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