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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틈이 May 11. 2017

'82년생 김지영'이 워킹맘이었다면

82년 4월. 서울의 한 산부인과에서 2.9킬로그램으로 태어남. 2남1녀 중 '또 딸'인 둘째딸. 딸자식이 나처럼 사는 거 싫어 '공부 열심히 해라' 잔소리하는 엄마. 자수성가한 아빠.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김지영은 그런 환경에서 나고자랐습니다. 81년 11월, 3.9킬로그램의 우량아였다는 점만 빼면 저는 김지영 씨와 똑닮았습니다.


여고 시절 교실 앞에 바바리맨이 출몰하고, 그래서 친구들끼리 모여 추리닝 입은 남자가 다가오면 무조건 피해야 한다, '꼴랑 그걸로 자랑하냐!' 큰소리 치면 오히려 도망간다는 대응법을 나눴습니다. 그 때 우린 김지영처럼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바바리맨을 쫓았다가 어른들에게 '여자애가 겁도 없이…' 칭찬대신 핀잔을 들었습니다.



똑같이 공부하고, 똑같이 노력해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시절을 즐긴 기억보다는 취업 준비한다고 스펙 쌓고 공부하던 기억이 더 많습니다. 4학년 2학기, 운이 좋아 남들보다 빨리 취업이 됐습니다. 그리고 서른살에 결혼을 했고, 그 다음해 임신을 했습니다.


임신을 확인한 날, 남편과 물잔을 들고 축하 건배를 했습니다. 다음날 남편은 회사에 자랑하며 한 턱을 냈지만, 저는 회사에 언제 알려야 하지 괜히 눈치가 보였습니다. 친한 선배에게 '저 임신했어요' 슬쩍 알렸지만 '축하해. 그런데 애는 어떻게 키울꺼야?' 묻더군요. 축하와 동시에 걱정을 들으니, 기운이 빠졌습니다. 여기까진 '82년생 김지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이었습니다.



출산예정일이 가까워 오면서 김지영 씨는 출산휴가만 낼지, 육아휴직을 할지, 퇴사할지 고민이 많아졌다. 나중에 퇴사를 하더라도 일단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한 쓰면서 방법을 찾는 것이 김지영 씨에게는 최선이지만 회사와 동료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소설 '82년생 김지영' 中)



육아휴직, 눈치보였습니다. 하지만 먼저 육아휴직 한 후배 워킹맘이 육아휴직 쓰라고, 한 명 한 명 더 써야 육아휴직을 쓰는 게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된다고 용기를 줬습니다. 웅이가 뱃속에 있던 2011년만 해도 '눈치가 보여도 쓸 수 있는게 어디야?' 감지덕지인 분위기였습니다.


김지영 씨와 정대현 씨는 아주 많이 이야기했다. 김지영 씨가 곧바로 복직할 경우, 1년의 육아휴직 이후 복직할 경우, 복직하지 않을 경우, 이렇게 세 가지 상황에서 육아는 누가 전담할지, 비용은 얼마나 들지,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를 커다란 종이에 차분히 정리해 갔다.
(소설 '82년생 김지영' 中)


 일단 육아휴직을 하자. 그리고 생각해보자 마음 먹었습니다. 육아휴직이 끝나가며 고민은 점점 깊어졌습니다.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가 웅이를 봐주신다면 조금은 걱정 덜고 출근할 수 있을텐데'라는 마음과 '나 키워주신 것도 감사한데 어떻게 손주까지 키워달라고 해. 우리끼리 알아서 해보자'는 마음이 맞섰습니다.



아이를 생각하면, 사표를 내는 게 맞는 것 같았습니다. 베이비시터 월급, 출근하면 매일 점심도 사먹어야 하고 옷도 사야지요. 그런 출근 '부대비용'에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는 스트레스까지 감안하면 맞벌이를 해도 경제적 득이 크게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복직을 하면 많지는 않아도 경제적 여유가 생깁니다. 육아휴직 기간, 살림이 빠듯했습니다. 10년 넘게 키워 온 내 일을 이렇게 그만 두는 것도 미련이 남았습니다. 육아휴직 후 퇴사한 선례를 남기지 말라는 선배들의 당부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엄마가 된 이상 누구나 서게되는 전업맘과 워킹맘의 갈림길. 김지영 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는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저는 '아이를 키우며 일도 해보자'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성가족부의 '2016 경력단절 여성 등의 경제활동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결혼과 임신 출산 양육 등으로 경력단절을 경험한 여성은 48.6%였습니다. 김지영씨와 같은 선택을 한 여성이 절반, 저와 같은 선택을 한 여성이 절반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책의 3분의2지점에서 김지영 씨는 사표를 냅니다. 궁금했습니다. 만약 김지영 씨가 사표를 내지 않았다면 '여자같지 않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회식 자리에 끝까지 남고 야근과 출장도 늘 자원하고 아이를 낳고도 한 달 만에 출근한' 김은실 팀장같이 살았을까, 아니면 '육아휴직을 쓰고 복직했지만 잦은 야근과 주말 근무, 월급 대부분을 베이비시터에게 쏟고도 늘 동동거리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남편과 매일 전화로 싸우고 어느 주말에 급기야 아이를 업고 출근'했던 후배처럼 만신창이가 되어 퇴사했을까.


그리고 김지영 씨와 똑닮은 삶을 살고, 워킹맘이 된 나를 돌아봅니다. 눈치는 보이지만 눈 딱 감고 육아휴직을 쓰고 복직한 나는 또 눈치는 보이지만 안 보이는 척 야근하는 동료들 뒤로 하고 칼퇴근해 아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향합니다.


오늘도 가장 먼저 사무실을 나서며 '승진은 물 건너갔구나' 씁쓸하기도 하고 '그래도 나한텐 승진보다 더 귀한 내새끼가 있다' 셀프위안하기도 하고 '그래도 출근할 수 있는 게 어디야.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면 일에 에너지 더 쏟을 수 있겠지 그 때 제대로 보여주자' 마음을 다잡기도 합니다.


종종걸음으로 집에 도착하면 환한 웃음으로 나를 반기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인간 피로회복제지요. 아이들을 안으면 피로가 싹 풀립니다. (아쉽게도 마음만요! 몸의 피로까진 풀리지 않고요 ㅋ) 아침까지만 해도 두 발뛰기를 못 해 한발씩 따당 뛰던 결이가 퇴근하고 오니 멋지게 두 발로 폴짝 뛰어 땅! 내려옵니다. '틈만 나면 연습하더니, 드디어 해냈구나' 물개박수가 나오는 동시에 마음 한 쪽에선 처음 해냈을 때 박수쳐 주지 못 한 게 아쉽고 미안합니다.



김지영 씨의 말처럼 "발을 동동거리고 불안해하고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래도 이제 내공 좀 쌓였다고 덜 불안해하고 죄책감 덜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유모차를 끌고 커피 한 잔 들고 공원에 갔던 날 서른 전후의 직장인 일행은 김지영 씨를 보고 '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라고 합니다. 김지영 씨는 뜨거운 커피를 왈칵왈칵 쏟으며 급히 공원을 빠져나옵니다.


아침 출근길, 뾰족구두 신고 웅이 결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다보면 지나가던 어르신이 '얼마나 벌겠다고 저 어린 것을…' 혀를 차십니다. 저는 자주 듣는 말이라 이젠 이골이 났지만 말귀 다 알아듣는 웅이 결이가 듣는 게 싫어 멀리 어르신이 보이면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전업맘인 김지영 씨는 맘충이라 욕먹고, 워킹맘인 난 '에미도 아니'라고 욕을 먹습니다. 엄마가 되고나니 엄마라는 자리가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건지 알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선택을 해도 응원받고 싶은데 어떤 선택을 해도 욕을 먹으니 '뭐 이래!' 싶습니다.


보통의 평범한 김지영 씨가 사표를 내지 않았다면, 보통의 평범한 워킹맘인 나처럼 살며 소설의 나머지 3분의1을 채웠을 수도 있었겠다 생각합니다. (어떤 삶일지 더 궁금하시면 책 '나는 워킹맘입니다'를 읽어 보세요! 어쩌다보니 책홍보입니다 ㅋㅋ)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길 바랬지만 소설 속 김지영은 일종의 정신병에 걸립니다. 씁쓸한 마음으로 책을 덮는데 '작가의 말'에 눈길이 머뭅니다. "늘 신중하고 정직하게 선택하고, 그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김지영 씨에게 정당한 보상과 응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다양한 기회와 선택지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지영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나 스스로에게 바라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그보다 더 바라는 게 있다면,


저에게는 지원이보다 다섯 살 많은 딸이 있습니다. 딸은 커서 우주비행사와 과학자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딸이 살아갈 세상은 제가 살아온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되어야 하고, 될 거라 믿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딸들이 더 크고, 높고, 많은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 또한 웅이 결이가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 낫길 간절히 바랍니다. 저 또한 우리 아이들이 조금 덜 애쓰고, 조금 더 행복하게 살길 바랍니다. 지금 내가 내딛고 있는 한 걸음이 아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더 나은 곳으로 바뀌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이 땅의 모든 82년생 김지영들,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 틈틈이의 글은 post.naver.com/zinc81​ 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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