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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든 Feb 17. 2022

<MBTI 인사이드> 후기

- 16 Personalities를 위한 변론


대중들 사이에 MBTI가 유행한 지 시간이 꽤 흘렀다. 이제 친한 친구들의 유형은 아는 것이 당연하고, 낯선 사이에서도 말문을 여는 단골 주제가 되었다. 유형의 특징과 원리를 심도 있게 파고드는 '과몰입러'도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가장 유행한 검사지는 '16 Personalities'로 불리는, 엄밀한 검증을 거치지 않은 약식 검사지이다. 정식 검사지는 훨씬 많은 문항에 많은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하고, 무엇보다 돈이 든다. 그러니 대중들에게 자기를 설명할 문장을 널리 소개한 것은 약식 검사지의 공일 것이다. 검사지의 신뢰도 수준은 그 공에 비하면 덜 중요한 문제로 보인다.



   유행에 대한 반작용으로, MBTI를 불신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들은 대중과 달리 믿지 않는 행위를 힙하게 여기는 것 같다. 누군가는 MBTI를 혈액형, 별자리와 같은 것으로 치부하는가 하면, 사람의 유형을 어떻게 겨우 16개로 나눌 수 있느냐는 나름대로 신념에 찬 불신도 있다.


   첫 번째 불신의 유형은 사실 단순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말이 별로 없다. 두 번째 불신의 유형, 사람의 유형을 16개에 가둘 수 없다는 주장은 이보다는 나은 생각거리를 준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과연 16가지보다 더 많은 유형으로 보았었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이보다 훨씬 대충, 성의 없는 기준으로 나누지 않았는가? 남과 여, 금수저와 흙수저, 좋은 사람과 별로인 사람, 사교적이거나 내성적인 사람 정도로 말이다. 이런 구분에는 보통 수직적인 판단이 개입되어 서열을 만든다.


<하트시그널 시즌2>의 출연진. 물론 재미있게 봤다.


   일반인이 출연하는 연애 관찰 예능을 보면 이러한 구분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외국계 대기업에 다니며 젠틀한 성격에 마르지엘라 코트를 걸친 30대 A', '프랑스 유학 후 돌아와 부모의 지원으로 스타트업을 차린 사교성 좋은 20대 대표 B' 등이 익숙한 사람의 꼬리표다. 시청자들은 이제 제작사의 의도에 따라 '스펙이 맞지 않는다'는 시장주의적인 판단도 더 이상 쉬쉬하지 않는다.



 

<MBTI 인사이드> 출연진


  <MBTI 인사이드>라는 최근 방영된 웹 예능이 있다. 참가한 16명의 남녀가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이름이 아닌 자신의 MBTI 유형으로 불리며 생활하는 것이 주요 컨셉이다. 비슷한 류의 일반인 출연 예능에서 하듯이 이름 아래에 나이와 직업, 소속 등을 적지 않는다. 시청자들도 출연자를 언급할 때 '아, 그 잘생긴 변호사?'가 아닌 '아, 요리 잘하던 ENTP님!'으로 떠올린다.


   MBTI, 그리고 이런 류의 성격 유형론이 대중화되며 나타난 유익이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수직적으로 사회적 위계를 따지던 각 사람의 꼬리표가 내면의 성품, 수평적이고 위계가 없는 언어로 대체된다. 덕분에 방구석에서 A와 B의 귀족놀이를 보던 취준생 C도 재기 발랄한 활동가, 선의의 옹호자, 뜨거운 논쟁을 즐기는 변론가로서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I(내향형) 유형 끼리 모아놓았을 때 생기는 일


   알래스카에 사는 이누이트는 50개가 넘는 눈의 종류를 구분할 줄 안다고 한다. 이누이트에게는 눈의 스펙트럼을 담을 언어의 집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똑같은 눈을 보고도 우리는 함박눈과 진눈깨비의 차이 정도를 대면 끝이지만 이누이트는 똑같아 보이는 눈의 속성을 훨씬 깊이 꿰뚫는다.


   우리는 어쩌면 자신과 타인을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도구를 얻은 것일지 모른다. 사회가 규정한 지위와 성격으로는 '현실감각 없는 철부지 외톨이'일지라도, 이 도구를 통하면 '최악의 상황이나 악한 사람에게서도 좋은 면만을 바라보며 긍정적이고 더 나은 상황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진정한 이상주의자'로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이 설명이 조금 더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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