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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브랜드를 증명하는 디자이너의 힘

디자인은 기술 너머의 감정을 읽어내는 일

by 박신희 교수

"로고 시안을 몇 개 더 보여주세요." "네, 준비해왔습니다." "아, 그런데 저희가 미드저니로 만든 것도 있어요. 한번 보실래요?"

5분 만에 나온 20개의 로고가 테이블 위에 놓였습니다. 완성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몇 주 동안 고민한 이 작업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디자이너라면 이런 경험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AI가 디자인을 위협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던져야 할 질문은 다릅니다.

디자인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아직도 많은 분들이 디자인을 '시각적 결과물'로 여깁니다. 로고, 포스터, 웹사이트 같은 형태적 산출물로 말입니다. 그래서 AI가 이런 것들을 훌륭하게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며 위기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잠깐, 애플의 로고는 왜 단순한 사과 모양일까요? 나이키는 왜 간단한 체크 표시를 택했을까요? 형태 자체로는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데, 우리는 왜 그 브랜드들을 떠올릴 때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요?

답은 명확합니다. 그 형태 뒤에 깊이 있는 이야기와 맥락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가 공부했던 맥락을 구축하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실행력 등이 더욱 중요한 가치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브랜드를 만든다

브랜드는 시각적 요소가 아닙니다. 브랜드는 이야기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그 브랜드에 대해 만들어내는 이야기입니다.

AI는 '스토리'의 외형은 설계할 수 있지만, 브랜드가 사람들에게 남기는 '공감의 기억'까지 설계하지는 못합니다. 다시 말해, AI는 이야기의 구조를 흉내 낼 수 있지만, 사람들의 감정 안에 남을 이야기의 '무게'를 결정하는 건 결국 인간의 통찰과 맥락 설계입니다.


이야기를 설계한다는 것

최근 한 스타트업 창업자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저희 서비스는 중고거래 플랫폼인데, 당근마켓과 뭐가 달라야 할까요?"

저는 되물었습니다. "당근마켓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중고거래죠."

"아니에요. 신뢰예요."

당근마켓의 진짜 혁신은 단순히 중고 물품을 사고파는 기능이 아닙니다. 온라인 거래에서 오프라인의 '신뢰감'을 구축한 것이죠.

사실 모든 중고거래 플랫폼이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거래 사기, 허위 매물, 무응답... 이런 것들 때문에 '신뢰할 수 없는 서비스'라는 인식이 뿌리 깊었거든요.

당근마켓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기능을 점진적으로 도입했습니다.

동네 인증으로 '지금 이 근처에 있는 사람'이라는 현실감을 만들었고, 실명 기반 후기 시스템으로 거래 상대방을 미리 파악할 수 있게 했습니다. 매너 평가는 단순한 점수를 넘어 커뮤니티 규범을 만들어냈죠. 여기에 당근이라는 따뜻한 캐릭터와 친근한 말투까지 더해지면서 다른 플랫폼과는 완전히 다른 감성을 구축했습니다.

이 모든 요소들이 하나로 합쳐져 '신뢰 생태계'를 만들어낸 겁니다.

즉, 당근마켓은 '중고거래'가 아니라 '신뢰'를 팔고 있는 거예요.


AI시대 디자이너의 일

그렇다면 AI 시대의 디자이너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1. 질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클라이언트가 "로고를 예쁘게 만들어주세요"라고 하면, "왜 로고가 필요한가요? 이 브랜드로 사람들이 무엇을 느꼈으면 하나요?"라고 물어야 합니다.

"소비자들이 우리 제품을 선택하는 진짜 이유가 뭘까요?" "경쟁사와 정말 다른 점이 있을까요?" "10년 후에도 이 브랜드가 사랑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이런 질문들이 브랜드의 진짜 이야기를 찾아내는 시작점입니다.


2. 모순을 발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브랜드 스토리에는 항상 모순이 있습니다. 나이키는 "Just Do It"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기획과 전략이 뒷받침됩니다. 애플은 '단순함'을 추구하지만, 그 단순함을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복잡한 과정을 거칩니다. 이런 역설적 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브랜드의 매력으로 만드는 게 관련 디자이너의 역할입니다.


3. 감정의 번역가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논리로 제품을 비교하지만, 감정으로 선택합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작업한 동네 카페 브랜딩 프로젝트에서 클라이언트는 처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카페는 원두가 좋아요. 콜롬비아산 아라비카 100%에 로스팅도 직접 하거든요."

맞습니다. 좋은 원두, 신선한 로스팅. 분명 논리적으로 우수한 조건들이죠. 하지만 고객들에게 이 정보가 진짜 중요할까요?

우리는 고객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30대 직장인 김씨는 이렇게 말했어요.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여기서 커피 한 잔 마시면, 왠지 오늘 하루가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사장님이 항상 웃으면서 인사해주시고, 창가 자리에서 보는 골목길 풍경도 좋고요."

이게 바로 감정적 번역입니다.

"콜롬비아산 아라비카 100%" → "하루를 기분좋게 시작하게 만들어주는 커피"
"신선한 직접 로스팅" → "정성스럽게 준비된 나만의 시간"
"동네 카페" → "매일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일상의 안식처"

결국 우리가 만든 브랜드 메시지는 "매일, 당신의 하루를 응원합니다"였습니다. 원두 이야기는 한 줄도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감정적 메시지가 매출 증가의 여러 요인 중 하나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같은 원두, 같은 맛인데 말이죠.


AI가 할 수 없는 일

AI에게 "카페 브랜딩 문구 만들어줘"라고 하면 뭐라고 할까요?

"프리미엄 원두로 만든 최고의 커피" "신선하고 맛있는 커피 전문점" "품질 좋은 커피를 합리적인 가격에"

논리적이고 정확하지만, 가슴을 뛰게 하지는 않습니다.

AI는 데이터를 완벽에 가깝게 분석할 수 있습니다.

"30대 직장인들이 오전 8-9시에 가장 많이 방문한다", "아메리카노 주문율이 67%다", "평균 체류시간은 12분이다" 같은 팩트들 말이죠.

하지만 "왜 그들이 바쁜 아침 시간에 12분을 여기서 보내는가?"에 대한 감정적 이유는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 12분이 그들에게는 "출근 전 마지막 자유시간"이고, "하루를 준비하는 의식"이며, "혼자만의 평화로운 순간"이라는 걸 이해하려면 공감이 필요합니다.


공감은 경험에서 나온다!

저도 매일 아침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출근 준비를 했던 경험이 있어요.

이른 아침 나에게 허용된 그 시간의 소중함을, 바리스타의 인사가 주는 따뜻함을, 창밖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그 감정을 몸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번역할 수 있었던 거죠.

AI는 아무리 많은 데이터를 학습해도 그 순간의 감정을 경험해본 적이 없습니다.

첫 출근 날의 떨림도, 승진 발표를 앞둔 긴장감도, 어떤 날의 쓸쓸함도 모르죠.

그래서 AI는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는 카페"라고 표현하지만, 사람은 "마음이 복잡한 날에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곳"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겁니다.

디자이너의 진짜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데이터와 사람을 잇는 방식


브랜드의 미래


앞으로 브랜드들은 그 완성 방식에 따라 여러 결을 가질 것입니다.

어떤 브랜드는 AI의 속도로 만들어집니다.
빠르고, 정교하고, 시각적으로 매끄럽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의 깊이가 얕다면,
금세 소비되고 잊힐 수도 있습니다.

반면, 사람의 손길과 질문, 그리고 고민에서 출발한 브랜드는
처음엔 투박하거나 더뎌 보일지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철학과 감정이 축적된 신뢰를 남깁니다.

중요한 건 누가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어떤 이야기를 담아,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입니다.

AI와 사람이 함께 만든 브랜드,
그것이 미래에 가장 오래 남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AI 시대에,
수많은 경험을 축적해 온 디자이너의 가치는 오히려 더 깊어졌습니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중요해지니까요.
그 일이란 바로, ‘의미를 만드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브랜드는
예쁜 로고나 세련된 광고로 증명되지 않을 것입니다.
명확한 철학, 일관된 이야기, 진정성 있는 감정으로 증명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을 설계하는 사람이 바로 디자이너입니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할 시간입니다.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보다,
나는 왜 디자인을 택했는지를 묻는 것.

그 답을 되찾은 디자이너는
기술을 넘어,
사람의 마음에 남는 브랜드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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