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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의 쓸모를 결정합니다

by 말자까

몽롱한 새벽에 계속 울리는 낯선 진동 벨소리가 제법 거슬린다. 애써 무시하며 잠을 깨지 않으려고 뒤척이는데 갑자기 번뜩 정신이 들었다.


‘아, 맞다. 내가 오늘 진료대기 핸드폰을 가지고 있었지.’


제주도에 위치한 우리 병원은 야간에 진료 전화응대를 받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다른 지역의 말 동물병원은 주 52시간제를 국가에서 도입하던 시점에 야간 1차 진료를 외주화 하면서, 야간 전화응대를 받아야 하는 의무가 없어졌다. 하지만 제주도의 경우에는 상태가 위중해 수술을 요하는 2차 응급일 때, 이 역할을 365일 대행할 수 있는 병원이 없기에, 우리 팀은 여전히 돌아가면서 매일 야간콜을 응대하고 있다. 이 제도도 사실 언제 멸종질 지 모른다.

새벽을 깨운 진동 벨소리는 역시나 내 가방 속 잠자고 있던 응급진료 전담 휴대폰이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 반쯤 되었다. 제주도의 한 외부 수의사의 전화였다.

“이른 아침 죄송합니다. 지금 진료를 해보니 말이 수술해야 할 정도로 응급 상황이어서 일단 연락드렸습니다. 점막이 어둡게 변하고 있고 심박수가 100회가 이미 넘네요. 언제쯤 진료가 가능할까요?”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원장님은 숨 가쁘게 상황을 전달했다. 아픈 말과 그 주인도, 그리고 새벽부터 호출된 담당 외부수의사 역시 훨씬 이른 새벽부터 고생한 모양이다. 말의 상황이 절대 응급임은 맞다. 그런데 바로 오시라는 말이 입 밖으로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일단 우리 집에서 내가 병원까지 가는 데만 해도 내 운전 속도로 최소 50분은 걸린다. 그리고 직원들은 9시가 되서 출근하니 그 때 팀을 구성할 수 있고, 수술을 세팅하는 시간도 꽤나 걸린다. 무엇보다도 담당 수의사가 전한 정보 모두가 예후가 극히 불량한 내용이어서 수술을 위한 마취가 과연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직원들을 모두 불러도 바로 수술할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 아니어서, 지금 말을 오라고 하나 출근 시간에 오라고 하나 사실 큰 시간 차이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단 대답했다. 지금 출발할 테니 1시간 후에 보자고 전했다.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전화를 듣고 있던 남편이 아이들 등교준비를 도와준다고 해서 더더욱 내가 시간을 지연시킬 이유가 없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글로리'의 마지막 회에서 탐정으로 살며 주인공을 돕던 ’강현남 이모님‘은, 복수전을 마친 후 일선에서 물러나 반찬가게를 운영하며 건조하게 살아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이모님 구합니다’라는 주인공의 의뢰 메시지를 다시 받는다. 이내 활기찬 배경음악만큼 활기 돋는 얼굴로 빨간 립스틱을 바르며 곧바로 그녀는 길을 나선다. 나는 병원으로 재빠르게 운전하며 가는 도중에 문득 그 장면과 음악이 떠올랐다.


내가 가는 이 상황 역시 같은 배경 음악이랑 꽤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따듯한 이불속 온기를 만끽하며 오만상을 하면서 이제 밥 지으러 일어나야 한다는 괴로움 속에 버둥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차이점은 나는 좋지 않은 상황을 향해서 가기에, 경쾌하지 않고 긴장된 채로 달린다는 점이다.


한 시간쯤 지나 병원에 거의 도착했다. 마지막 신호대기에서 내 차 뒤에 말 수송차가 따라 들어왔다. 말을 내리니 말은 지칠 대로 지쳐 있고, 주인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부랴부랴 병원 문을 열고, 혈액검사를 위한 장비를 세팅하고, 불을 켜고, 진료를 위한 틀 안에 말을 넣었다. 나도 혼자고 주인도 혼자이다 보니, 마음은 급하지만 모든 게 느릴 수밖에 없었다. 혈액 검사를 위해서 주사기로 혈관을 찔렀는데, 혈액이 너무 진득해서 잘 나오지를 않는다.


불길한 예감이다. 체온, 심박수, 호흡수 모두 비정상이고 잇몸 색깔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혈액 검사 결과를 보니 불길함이 거의 확신에 찼다. 마취가 불가한 상황이고 말은 쇼크로 쓰러져서 죽기 직전인 상태이며 지금 스스로 서 있는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 급한 대로 카테터를 잡고 수액을 달았다. 사실 이 정도면 인도적 처리를 위한 기준이 된다. 그래도 무슨 문제인지는 대략이라도 찾고, 주인에게 전달해야 할 것 같아서 복부 초음파를 대보니 아무래도 내장이 뱃속에서 이미 터진 것 같다.


주인에게 안락사를 이야기할 시점이 된 것 같아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말이 갑자기 보정틀 내에서 쇼크가 와서 쓰러졌다. 순식간에 쓰러지는 바람에 목이 틀 안에 끼어서 문을 열어줘야 하는데, 주인과 나 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내 힘으로 도저히 앞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 와중에 말은 고통스러워하며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보정틀에 끼인 채로 허공에 발을 마구 굴러댔고 그러면서 뒤쪽 보정틀 일부가 파손되었다.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주인이나 내가 큰 부상을 입을 수 있을 정도의 무서운 상황이었다. 부랴 부랴 연장을 찾아와서 문을 억지로 열고 말이 옆을 눕도록 진정시켰다. 어차피 말은 일어나기 힘든 회복 불가 상황이다. 주인에게 현재까지의 진단 결과를 설명하고 인도적 처리에 대한 동의를 구했다.


주인의 동의 후에 안락사 약제로 말을 하늘로 보내주었다. 주인은 말의 눈에서 눈물이 나온다며 한참이나 슬퍼했고, 어제 말 상태를 체크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은 아니라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위로하였으나 그 위로가 닿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느덧 출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이제는 사체 처리를 어떻게 할지 궁리하고 지시해야 하는 게 내 역할이었다. 청소여사님이 놀라지 않도록 말의 얼굴을 일단 천으로 덮었다. 말을 들어서 이동시켜 줄 수 있는 지게차 기사님을 호출했다. 주인은 집에 가서 트럭을 가져온 후 우리와 함께 말을 실었다. 사람이 죽은 후에 땅에 묻히기 전까지 어떻게 처리가 되는지 사실 우리 대부분은 모른다.


하지만 말은 워낙 크고 무겁기 때문에, 죽은 말을 들어 올려서 차에 싣는 과정 모두를 함께 힘을 보태야 한다. 그 일은 깔끔하지 않다. 연차 많은 우리 원무 과장님이 선두지휘하며 힘을 써서 잘 리드해 주셨다. 내년에 은퇴하시고 나면 과연 내가 이걸 다 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차량 장비들로 사체를 싣는 그로스한 과정을 한참을 도와주고야 일이 끝났다.


주인과 그 가족은 오히려 우리에게 고맙다고 했다. 나는 몸둘 바를 몰랐다. 나는 내가 해준 게 아무것도 없어서 죄송하다고 했다.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저도 사실 안될 줄 알았어요. 그래도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방법이 있을까 해서 새벽에 연락드린 거예요.”

그 새벽 전화를 받고서 말의 예후를 생각하며 이동 여부를 저울질 했었던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어차피 내가 일찍 와도 말은 수술이 어려운 상황인데, 그냥 출근시간 맞춰서 기다렸다가 말을 오라고 할까 잠시 고민했던 내 마음이 못내 미안했다. 나도 말이 어려운 상황인 것을 아는 것처럼, 사실 주인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전화 넘어 인식해 준 것, 나는 그것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는 내 쓰임이 이미 출발할 때부터 주인의 절박한 마음에 대한 반응으로 쓰일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아픈 말을 조금 일찍 하늘로 보내준 것 말고는 내가 도와준 일이 없었다.


애써서 키워온 말이 결국 하루아침에 죽어서 그 허무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일 것 같은데, 오히려 주인은 나한테 인사까지 해주고 떠났다. 아침 소동이 무색하게 병원은 다시 조용해졌다. 내 심장만 아직 뛰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나에게는 이런 내 쓸모 자체가 여전히 나를 빨간 립스틱을 바르도록 만들어 주는 것 같다.


내 쓸모를 여전히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조금 힘들더라도 나를 찾는 그 순간에 바로 반응하여 ‘강현남 이모님’처럼 튀어나가도록 정신을 조금 더 차려야겠다. 누구에게나 마음 한 곳에는 기꺼이 쓰이기 위한, 그리고 제대로 쓰이고 싶어하는 본인만의 빨간 립스틱이 있을 것이다. 맞고 살던 명랑한 강현남 이모님은 알고 보니 탁월한 탐정이었다.


벚꽃이 휘날리는 요즘 한참 번식 시즌이라 다들 바쁜 날들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조용한 병원 안에서 가만히 혼자 있다 보니, 오늘은 내가 마치 반찬가게에서 멍하게 밥 먹고 있는 현남이 이모님 같다. 편안함이 좋으면서도 무기력해져서 진료대기 폰이나 만지작 거리는 나도 참 별스럽다.


내가 구하고자 하는 것과,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이 맞아 떨어지는 날이 응급 전화 벨소리가 울리는 날이라면, 나는 멸종의 그날까지 빨간 립스틱을 항상 지니고 살아갈 셈이다. 변화의 파도 속에서 나는 파도 속에 몸을 맡겨야 내가 편한 걸 알지만, 사실 나는 그 파도에게 몸을 맡기지도 거스를 필요도 없이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바닷물 그 자체로 존재하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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