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의 키다리 아저씨

by 말자까

한 시간만 지나면 퇴근시간이다. 유난히 시계만 자꾸 보게 되던 무료한 주말 오후였다. '퇴근길은 어떤 길이 덜 막힐라나?', '저녁은 뭘 만들어야 하나?' 등등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내 머릿속은 이미 회사 밖이었다. 갑자기 사무실에 전화가 울렸다. 전화는 울리라고 있는 것이지만, 왜 이리 소란스럽게 울려대는지 뭔가 불길했다. 이윽고, 내 전화 응답 소리에 사무실의 다른 직원들도 다들 귀를 쫑긋 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 말이 입으로 음식을 먹는데 코로 풀이 다시 나오고 있다고요?"


증상이 심상치 않다. 일단 병원으로 오라고 전달하고 전화를 끊었다. 야근각이다. 동료들도 이미 내 전화 응답에 부산스러워졌다. 오늘은 함께 근무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나, 막내수의사, 테크니션, 그리고 실습생. 총 네 명밖에 없는 단출한 주말이었다. 뭔가 쓰나미가 오는 듯한데, 막을 사람은 우리 넷 뿐이다.


목이 긴 말은 입 안의 음식물이 위까지 도달하는 통로인 식도 또한 길다. 사람의 식도는 약 25 cm의

길이인데 비해, 말의 식도는 약 150 cm 나 된다. 말이 평소에 먹는 주식은 마른 건초나 사료다. 식성에 따라 제각기 먹는 속도가 다르지만, 대부분 이빨로 건초를 질겅질겅 씹어서 자르고 으깬 다음에 꿀꺽 삼키게 된다. 그런데, 그러다 운이 나쁘면 뭉쳐진 풀덩이가 식도의 어딘가에 제대로 딱 걸리게 된다.


사람도 가끔 커다란 알약 같은 무언가를 먹다가 운나쁘게 식도 어딘가에 불편하게 걸릴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물을 엄청 먹든지, 기침을 하든지 하면서 어떻게든 걸린 것을 넘긴다. 하지만 말은 다르다. 기다란 식도의 한복판에 아주 딱딱한 풀덩이가 제대로 길을 막는다. 그런데 말은 구토를 하지도 못하고, 기침으로 빼내지도 못한다. 심지어 그 와중에도 또 먹다 보니깐, 음식물은 다시 역류하다가 콧구멍으로 까지 나오면서 그제야 우리는 증상을 알게 되는 것이다. 목이 길어 슬픈 동물이다.


말이 병원에 도착했다. 위내시경으로 살펴보니 역시나 목구멍 바로 뒤의 식도에 아주 꽉 막힌 풀덩이가 있었다. 급성 식도폐색(choke)이었다. 진단도 명확했고 이 질환이 말에게서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쓰나미는 다행히 넷이서 붙어 볼만하다고 여겼다. 심지어 종료시간을 예측까지 해보는 자신감까지 있었다. 미래를 알지 못해 슬픈 인간이다.


그림출처: https://www.extension.iastate.edu/


일단 말에게 정신을 몽롱하게 해주는 진정제를 주사했다. 네 다리로 서 있지만 고개가 축 처졌다. 지속시간은 길게 한 시간이다. 우리는 내시경을 통해서 막힌 풀을 빼내려고 이리저리 시도해 봤다. 막힌 풀덩이에 물을 주입시켜서 밀어 넣기도 해 보고, 내시경을 통해 넣을 수 있는 작은 집게로 풀을 조금씩 뜯어서 끄집어내보기도 했다.


문제는 생각보다 너무 꽉 막혀서 아무리 해도 빙산의 꼭대기만 깨작거리는 상황이었다. 추가 주사를 네댓 번은 더 넣었다. 진도가 안 나갔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늦은 밤이 되었다. 말을 잡아주는 말관리자는 말의 머리를 몇 시간 동안 잡아주다 지쳐갔다. 물을 바가지로 넣어다 뺐다 해주는 사람, 기구를 넣었다 뺐다 해주는 사람, 화면을 보고 내시경을 조작하는 사람 등 우리 모두는 각자의 역할에 집중했으나, 도무지 빠지지를 않았다.


급기야 말관리자가 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꺼풀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너무 장비를 오래 써서 도구 하나가 망가져 버렸다. “한 5분만 쉬었다가 다시 해 보시죠.” 라는 말을 벌써 서너 번 반복한 것 같고, 이러다 날을 샐 것 같았다. 대여섯 시간이 지났나 보다. 도무지 내 고집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손이 얼얼했다. 결국 후퇴를 선언했다. "내일 아침 다시 시작해 보겠습니다."라고 말을 하고선 다들 해산시켰다. 말도 힘들고 우리도 힘들었고, 무엇보다 가장 힘든 건 내일도 별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었다. 내가 뭘 잘못하는 건지, 이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건지 막막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사면초가에 몰린 나는 전화를 걸었다. 내가 의지할 유일한 분이다. 같은 회사의 수의사 부장님이었는데 현재는 퇴사하셨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왕년에 최고의 말 수술 실력뿐만 아니라, 꼼꼼한 업무 능력까지 겸비한 핵인싸 '고수' 님이시다. 재직 중에 서로 근무 지역이 달랐는데, 돌연 퇴사하셔서 친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돌고 돌아 몇 년 전 제주도의 다른 말병원으로 이직하셔서, 덕분에 나는 자주 만나 온갖 수술 질문, 인생 질문을 이제야 그분께 참 많이 물어보고 의지한다.


"부장님, 밤늦게 죄송해요. 혹시 통화되세요?"라는 질문으로 나는 오늘의 역경을 줄줄 읊었다. 남 앞에서 물어볼 수 없는 질문까지 다 물어봤다. "부장님, 내일 다시 해야 하는데 저 솔직히 정말 막막해요. 이 방식으로는 내일도 어찌 될지 모르겠어요. 부장님 어쩌죠?" 밤늦게 술 주정하듯이, 막막함을 나불거리는 내가 너무 안쓰러웠을까? 부장님은 놀랍게도 불과 몇 시간 후인 내일 아침 아홉 시에 직접 와서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고 다시 말을 준비했다. 전날 몇 시간 동안 생노동을 했던 우리는, 오늘도 엄청나게 긴 하루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정말로 회색 머리의 부장님이 포스를 풍기며 우리 병원에 등장하셨고, 뭔가 다른 방법을 시도하셨다. 풀덩이를 녹일 수 있게 물을 쏘는 호스의 굵기를 얇은 것을 선택했고, 호스 끝의 구멍을 약간 변형시켜서 수압이 더 세게 풀덩이로 가게 했다. 전날 그 모든 방법에서 실패를 했던 우리는, 무조건 부장님의 오더를 따랐다. 하지만, 나 역시 그때까지만 해도 그래도 오늘 역시 한참 걸리겠다..라는 걱정이 더 컸다.


뭔가 별다를 것 없는 방식 같았다. 하지만 미세한 차이는 확실히 있었다. 어제와 같이 물을 넣었다 뺐다를 무한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수십 번 했을 즈음, 나는 부장님도 지치실 줄 알았다. 그런데 특유의 태연함으로,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해보시죠. 아주 좋아요."라는 멘트로 모두의 불안함을 잠식시켰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정말 그 풀덩이가 조금씩 더 뒤로 밀리더니 식도 뒤로 쓱 넘어가 버렸다.


"와!!!!!". 땀 흘리던 우리 막내수의사는 눈이 똥그래져서 환호하며 박수를 쳐댔다. 우리 모두의 체증이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부장님은 말도 살리고, 밤새 끙끙댄 우리 모두를 살리셨다. 그리고 부장님은 우리의 감사 표현을 다 받기도 전에, 주말에 따님과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구름처럼 홀연히 사라지셨다.


그간 나는 늘 불평하기만 했다. '나는 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을까?' '나는 왜 못하게 할까?' '나는 누구를 따라야 할까?' 등등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환경에 대한 불안이 컸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은 부장님이 꿈처럼 나의 스승님이 되었다. 내가 상심했을 때도, 내가 고집을 부릴 때도 일단 사려 깊게 들어주시는 분, 그런 분이 이제는 나에게도 존재한다는 게 나는 참 황송하다. 새옹지마는 이럴 때 쓰는 말 같다.


말이 건강히 잘 퇴원한 후 한참 지난 어느 날, 부장님께 한번 물었다. "부장님, 그날 어쩌면 그렇게 정확히 잘 빼내는 내공을 아셨어요? 그걸 어떻게 연마하셨어요?", "아, 그 바로 며칠 전에 비슷한 케이스가 있어서 똑같이 여러 시간 고생했고, 그러다 알게 되었지 뭐." 저렇게 쿨하게 이야기하는 그 기술과, 겸손한 마인드까지.. 정말 나는 앞으로도 부장님께 배울 게 끝도 없다. 다소 신선 같은 사차원 세계관에, 노잼 농담으로 항상 주위를 얼게 만드는 분. 하지만 누가 뭐래도 부장님은 지금도, 앞으로도 나의 멋진 키다리 아저씨다.


keyword
이전 02화말이랑 첫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