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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첫 만남

by 말자까

수의사라 하면 뱀부터 코끼리까지 모든 동물을 치료하는 능력이 장착된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수의과대학 시절 내내 주구장창 뭔가를 배우지만, 다소 마이너한 동물에 대해서는 배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이 할애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나의 대학 시절에 '말'은 마이너한 '기타 동물'도 아니고 '점' 하나정도의 스쳐 지나가는 페이지였다. 실습 시간에 말 농장 한번 가본 게 전부 다였고, 시골에 살던 나는 경마장과 승마장은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나에게 말이란 사극 드라마에서나 나오던 뒷 배경 같은 그 정도의 흐릿한 이미지였다.


그러던 내가 말을 제대로 본건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다가 보게 된 '살아있는' 말이었다. 몸이 생각보다 너무 컸고, 얼굴을 쳐다보려면 내가 올려다봐야 했다. 털은 너무 빽빽한 진갈색인데 윤기 나는 털 밑의 근육이 과도하게 돋보여서 그 근육에 깔릴까 봐 괜히 쫄렸다. 안전거리도 없이 내가 이렇게 서있어도 되나 일단 무섭기만 했다. 일진처럼 무시무시한 근육맨의 단단한 발굽을 보면 나는 눈을 내리깔 수밖에 없는데, 또 슬쩍 말의 얼굴을 보니 오히려 나를 무서워하는 듯이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혹시 너도 쫄보인가 싶은 친밀감이 처음으로 들기도 했다. 그게 말과의 첫 만남, 쫄보 둘의 첫 만남이었다.


입사 후에는 나는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바로 뭔가를 해야만 했다. 말의 목에서 채혈을 해야 하는 일부터 차곡차곡 배워갔다. 배우고 익히느라 몇 달이 훅 지났다. 한 번은 말을 끌고 한 나이 많은 말관리사가 동물병원에 들어왔다. 그날은 나 밖에 없는 날이어서 내가 접수에 응대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아저씨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수의사님 없어요?"


나는 대답했다.


"아 네, 잠시만요."


그리고선 사무실에 다시 들어가서 신발 한번 갈아 신고 온 다음 다시 나갔다.


"제가 수의산데요."


"...."


아저씨는 당황했지만,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체념한 듯 말을 나에게 바쳤다(?). 그리고 나는 덜덜 떨리지만 멀쩡한 척하며 그간 채혈 실력을 바탕으로 목에다 주사를 했다.


그러면서 말 동네 사람들은 나에게, 나는 말에게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우리 부서 상사가 수술복을 입고 거대한 말의 배를 칼로 열어 수술을 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게 되었다. 정말 빛나 보였다. 이 회사에서도 동물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다고 각인된 날이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 회사를 계속 다니면 나도 어쩌면 저런 일도 할 수 있겠다는 희망도 생겼다.


어느덧 말과 함께 한지 20년이 다 돼 간다. 전국의 여러 사업장을 떠돌며 임상 파트뿐 아니라 비임상 파트에서도 다양한 많은 일을 해왔다. 긴 시간에 비해서 현재의 동물병원 말 수의사 팀장으로서의 내 모습은 하나의 조각일 수 있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만큼 희망했고 소중한 만큼 유한한 시간이 너무 아쉬워서 기록하기 시작했다. 혼자 간직하던 사진이나 동영상과 달리, 이제는 내 마음을 글로 박제해서 말 동물병원 속에서의 많은 이들의 뜨거운 일상을 나누고 싶었다. 잘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 누군가에겐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편하게 찾아졌으면 좋겠다. 이 글의 등장인물이나 말은 사실에 근거했으나, 실명은 밝히지 않았다. 혹여나 말에 대한 누군가의 진심을 묘사하는데 부족했던 점이 있다면 너그러운 이해를 구한다.


앞으로도 나는 지금껏 말과 함께 했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말과 함께 할 것이라 믿는다. 이 글이 산 중턱 정도에서의 도시락 꾸러미 정도의 글이면 좋겠다. 앞으로도 더 힘을 내서 오랜 시간 천천히 깊은 산을 뚜벅뚜벅 더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여전히 희망한다. 내일이 어떨지 모르는 채 살아가는 것은 불안하다. 하지만, 그만큼 또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충실할 수 있어서 나름 괜찮은 삶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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