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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일하게 됐지만요

by 말자까

"말 수의사를 원래 하고 싶었어요?"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늘 난감하다.


"아니오. 어쩌다 여기서 일하게 되었어요."


여기서 더 말하면 더 곤란한 답밖에 없는데 상대의 궁금증이 풀리지 않으니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실체를 토로한다.


"가난한 저는 졸업 직후 바로 돈을 벌어야 해서, 돈 많이 준다는 회사에 입사했어요. 거기서 말을 처음 본거나 다름없어요. 평소에 배운 적도 없었어요."


답변 후 잠시 정적이 온다. 왠지 내가 무지개빛 만화를 회색으로 만드는 것 같아서 살짝 미안하다. 원래는 말을 치료하고 싶은 강렬한 동기가 있었고, 그것을 배우기 위한 거친 역경이 있어야 했고, 현재의 화려함을 줄줄 나열해야 하는데, 나는 다소 특이한 타이틀 때문에 비치는 관심에 비해서는, 아주 못 미더운 속빈 강정 같기만 하다. 그래서 늘 면목이 없다.


그런 나에게, 질문자는 포기란 없다는 눈을 반짝이며 뭐라도 얻고 싶어서 두 번째 질문을 던진다.

"그래도 여자로서 말수의사 하기 힘들지 않아요?"

두 번째로 많이 받아본 질문이다. 힘들었던 이야기만 백만개 하고 싶지만 체면을 좀 차린다.


"힘들 때도, 아닐 때도 있어요."


몇 년 전 내 일터가 촬영 현장으로 변신한 적이 있었다. 여주인공이 무려 말 수의사라는 설정으로 드라마 촬영 의뢰가 왔었다. 꽤 놀라면서도 궁금했다. 도대체 '여자 말 수의사'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전체 인구에서 현업 수의사는 대략 15,000명 정도이다. 그중에서 말을 진료하는 수의사는 현재 100명 이하인데, 그중 여자 말수의사는 10여 명 남짓이다. 그 몇 안 되는 인원조차 말이 사는 시골이나 경마장의 제한구역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지나가며 흔히 볼 수가 없다. 이 상황에서 과연 PD님은 드라마에서 말 수의사를 어떤 이미지로 여기고 있을까 촬영 전 호기심이 일었다.


다행스럽게도 장르가 다큐가 아니고 드라마였기에 여주인공은 비주얼 적으로 엄청 멋들어지게 설정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그러니깐 세트장 안의 여자 말 수의사 주인공은, 엄청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었다. 밋밋한 나의 일터는, 수많은 드라마 촬영진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 끝에 '대변신'을 했다.


가장 신나는 건 나만의 집무실이 생겼다는 것이다. 멋진 책상과 형형색색의 인테리어 세트를 매주 만들고 부순다. 내 방에서 나는 사장님처럼 전화를 받는다. 거기에, 나만의 티타임 공간도 생겼다. 그곳에서 나는 언제든지 쉬고 수다를 떨면서 연애도 한다. 가장 웃긴 건, 내가 새하얀 긴 가운을 입고, 간지나는 헌터 부츠까지 신고선 진료를 한다. 거기에 스타일리시한 블라우스까지 받쳐주니 그 화사한 미모가 더 부각된다.


사실 그 겨울, 동물병원에서의 나의 근무 복장은 똥 뭍은 안전화와, 약 뭍은 등산바지, 그리고 피 뭍은 등산 잠바였다. 촬영팀이 나에게 가끔 진료 관련 코멘트를 물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스텝 분들이 바로 코 앞에서 구경하고 있는 나를 찾지 못해 전화로 나를 찾아 헤매던 게 웃겼던 기억이 있다.



그들은 그 몇 초를 찍자고 수십 명이 세트를 조립하고 분해해 가며 야밤까지 분주했다.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눈을 붙이며 피곤을 달래는 스텝과 함께 수차례 재촬영하는데, 오히려 주인공은 나보다 더 태연하고 능숙하게 진료 장면을 재현해 냈다. 그렇게 만든 판타지 속 말 동물병원에서는 말들이 나를 줄줄이 기다리고, 나는 모든 말을 치료하는 만능 해결사다. 그 와중에 나는 연애도 잘하고 능력도 좋은 최강 꽃미녀 능력자다. 나는 내 등산잠바를 껴입은 채로 그녀를 쳐다보며 대리만족감을 느꼈다.


말이 뭔지도 모르고 얼떨결에 들어온 어설픈 나, 여전히 녹록지 않은 하루, 냄새나는 나의 진료복, 나의 이 모든 모습이 어쩌면 수십 명의 촬영진들이 뒤엉켜서 졸며 찍고 있는 밤샘촬영 현장 그 자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엉망진창 자체이다. 하지만 뭐 어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나만의 이상적인 판타지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그린다. 내 모습이 어떻든 간에 넓지 않은 말 세상 현실 속, 몇 안 되는 한 명이 여전히 '나'라는 것은 변치 않으니깐. 그래서 나는 그 무지개가 될 땀나는 하루 하루의 ‘일상‘을 건져서 ’글‘로 적어보았다.


여전히 나는 초라하고, 불완전하고, 답보한다. 매일매일이 땀나는 다큐다. 하지만 그 다큐를 만드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아직 나는 멋진 집무실도, 만능 능력도, 멋진 가운도 없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판타지를 그린다. 판타지 속 나는 누구보다 말에 대해 잘 알고, 겸손하고, 빛나고, 힘세고도 온화한 은빛 머리를 가진 할머니다. 나만의 판타지 속 그녀가 훗날 질문을 받는다면, 이제는 부끄럽지 않고 보다 당당하게, 그 드라마 주인공 같은 화사함을 뿜으며 내 무지개빛 인생을 회고할 그 날을 그려본다.


"과거엔 그랬지만, 현재 저는 말의 매력에 대해서 누구보다 더 잘 말할 수 있어요."


"과거엔 그랬지만, 현재는 여자 말수의사만이 할 수 있는 좋은 점이 얼마나 많았는지 어디 한번 들어나 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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