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거당인(거절당하는 인간)

by 말자까

나는 입사에 비해 승진이 아주 여러번 밀려있는 연차만 많은 만년 과장이다. 나보다 입사를 늦게 했지만 일찍 승진한 사람들도 이제 많다. 사실상 꼴찌 그룹이다. 그동안 여러 글로도 아픔과 극복을 반복하며 그렇게 살아오고 있다. 그러다 얼마전 문득 사내공지문을 보고 귀가 좀 멍해졌다. 처음 생긴 특별승진인사 모집 공고문이다. 성과가 엄청 좋고, 연차도 낮은 누군가를 뽑기 위한 제도라고 소문이 난무한다.


사실 내 옷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올해 역시 나보다 훨씬 점수 높은 후배들이 포진하여 연말 정기 승진 인사에도 사실상 먹구름인걸 안다. 실로 나는 찬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닌 하위군이다. 무엇보다 내가 몇년 째 이렇게 정체되어서 우리 부서원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버티기 힘들다. 가까운 사람들은 나에게 인생이 그게 다가 아니라며 위로한다. 맞다. 우물 밖으로 나오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내 인생의 우선순위는 훨씬 더 많고, 나를 여겨 주는 딱 그만큼만 일하자고 생각한다. 내가 인생에서 가치롭게 여기는 것에 더 몰두하고자 다짐한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출근 생각과 동시에 울화가 치민다. 같이 입사했던 내 동기들은 그간 얼마나 큰 혜택을 받은걸까? 저들은 매년 승진 인사에 마음 졸일 필요도 없고, 일해놓고도 매년 떨 필요도 없고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아무도 나에게 특별 승진 인사에 신청하라고 하지 않았다. 신청자의 성과기술서를 모아서 전직원에게 전체 공지한단다. 그리고 공정하게(?) 선발한단다. 한번도 이런 적이 없던 제도이다. 수백명 앞에다 나도 아직 존재하고 있다고 나를 디밀며 들러리를 서야 한다. 신청을 하는 것이 눈치가 없는 일인지, 신청을 안하는 것이 눈치가 없는 일인지 고민이 되었다. 주어진 기회를 내 발로 차기도 싫고, 누군가의 옆에 똥차가 서있는 부끄러움을 감당하기도 싫었다. 사면초가에 몰린 나는 맨날 가족들 몰래 한숨만 쉬었다. 짜증난다고 그만둘 수 없는 생계형 직장인인 나는 그저 몰래 숨죽여 울 수 밖에 없었다.


고심끝에 결국 나는 신청서를 제출했다. 승진은 못했지만 현재 부서 선임 역할을 하고 있는 나는, 후배들한테 이런 고민을 배출하면서 부담을 주기 싫어서, 혼자 며칠간 폭풍 속을 걷다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신청서를 제출했다. 내일부터 전체 공개되는 부끄러움을 감당하기로 했다. 눈치 없는 나대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공식적으로 또 거절 당하기로 했다. 들러리를 서더라도 내 이름이라도 누군가 읽는 것에 목표를 두기로 했다. ‘아. 쟤가 아직도 승진 못하고 저기에 있었구나.’ 라고 1초간 생각해 주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여러 낮밤동안 머리를 뜯으며 작성한 내 성과보고서는 어디로 표류하고 그 결과 나는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다. 내 글이지만 두 번 다시 거들떠 보기도 싫은 글이다. 참 열심히 일했고, 내 성과에는 하등의 거짓이 없지만 그걸 공개 재단하는 제도 자체가 불편하다. 분명 누군가 이걸 뜯어먹고 까내리며 입방아를 쌓을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회사 생활하면서 가장 큰 용기를 낸건 아무래도 작년에 거절당하기 프로젝트를 스스로 시작해서 그런 것 같다. 이미 나는 거당인이 되어 있었고, 내가 두려워하는 것을 결국 나답게 넘었다. 전체공개된 내 글이 익명의 군중에게 조롱받고 뜯어먹히기를 감당하기로 했다. 그리고 정당하게 거절당하기로 했다. 결과 발표와 상관 없이 작년보다 조금 더 두려움을 뛰어넘는 용기가 더 커진 나의 변화에만 집중해보자. 익명이 무서워서 피해 숨지 않고 그냥 내던진건 나 스스로의 결정이다. 나는 거당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잊지말자. 거절 당하는건 미션 성공이고, 난 제출할 용기를 낸 것으로서 이미 내 소임은 다 했다. 덜덜.



[브런치북] 매달 거절당하는 사람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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