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평안하고 조용했던 여느 날과 같은 오후, 갑자기 전화 한 통 없이 말 한 마리와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말은 배가 불룩하고 큰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보호자에게 전화 좀 먼저 하고 오시지 라고 퉁박할 틈도 없이, 얼떨결에 응급말에 대한 진료가 시작되었다. 심박수도 높고, 장음은 잘 들리지 않았다. 혈액검사는 최악이었고 잇몸 색깔은 정상이 아니었다.
보호자는 이 말이 생후 2개월일 때 배를 열어 큰 수술을 했던 말이라고 했다. 보호자는 우리를 전혀 탓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냥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도 같다. 그때도 말은 지금처럼 갑자기 들이닥쳤을 것이다. 그리고 얼떨결에 진료를 시작했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후에 하는 수술의 위험성과 예후에 대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보호자는 수술을 해달라고 했을 테다. 그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니깐.
우리는 모든 최선을 다해서 그래도 수술을 했고, 보호자도 모든 최선을 다해서 낮밤으로 입원실을 지켰던 것 같다. 사실 수술 전에 위험성에 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고, 또 수술 후에도 합병증에 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나는 늘 한다. 때로는 그러는 내가 겁쟁이 같기도 하다. 꼭 생기라는 법도 없는데, 괜스레 더 강조하는 듯한 무서운 부정적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로 보호자에게 위험을 고지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일이 생기지 않기를 누구보다도 바라는 긍정을 바라본다.
신생 망아지 시절 어려운 수술의 고비를 잘 이기고, 험난한 입원관리까지 잘 마치고 퇴원했었다. 후에도 이 말은 성장하면서 여러 번 크고 작은 통증이 왔었다고 한다. 아플 때마다 또 약을 맞고 치료를 해왔을 텐데, 그럴 때마다 보호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때 말한 그 합병증이 시작되는 건지, 이러다 결국 또 장이 꼬여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건지 불안했을까, 아니면 그럼에도 잘 넘길 거라고 희망을 가졌을까.
결국 갑작스럽게 큰 병원까지 온 오늘은 분명 더 큰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보호자도 아마 짐작했을 것 같다. 그리고 검사 후 우리는 보호자에게, 장이 안에서 이미 터진 것이 확인되었고 더 이상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주인은 덤덤히 말을 데려갔다. 이 모든 상황이 굉장히 빠르고 신속하게 지나갔다. 뭔가를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었다. 후회나 추억, 복기라고는 들어올 틈도 없이, 그냥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듯 너무나 심하게 평범하게 지나가 버렸다.
죄송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고, 안타깝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냥 우리의 최종 판정을 듣자마자, 별말 없이 집으로 돌아가서, 말을 떠나보내며 보호자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때 괜히 수술해서 고생만 했다고 후회했을까. 그 숱한 시절 애쓰며 처치했던 우리는 결국 헛고생을 한 걸까. 허망함을 깊게 느끼기 싫어서, 그냥 덮어두고 하루를 끝내고 있을까. 내일 밥줄 말이 없는 빈 공간을 보았을 때 그마다 또 어떻게 지낼까. 내가 망아지에게 개입했던 시간은 짧았지만, 그는 망아지의 출생 전부터 모든 시간 동안 그 말을 책임지고 있었던 '보호자'였다.
오늘따라 평소와는 다르게 환자 ‘말’보다는 보호자 '주인'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 그 모든 것을 감당해 왔고, 감당하고 있는 주인의 무거운 어깨에 비해, 고작 상황 진단 정도밖에 제시하지 못한 우리가 왠지 무책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맨날 무시무시한 소리만 해대며 자기 방어를 했던 나의 모습, 왜 이제야 왔냐며 상대 탓으로 유도하는 나의 모습이 더 보기 싫었다.
그렇다면, 시간을 되돌린다면, 나는 1년 전 그 상황에서 주인에게 다른 길을 제시할 수 있었을까? 수술을 해도 술 후에 나빠질 수 있고, 나중에 또 재발해서 죽을 수 있으니깐 그냥 지금 수술 안 하고 멈추는 게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저승사자가 될 수 있었을까? 글쎄, 다시 돌이킨다 해도 그건 아니다. 내 기준으로는 그게 오히려 훨씬 더 무책임하고 구차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그 당시 합병증 고지를 하면서도 희망을 바라는 내 속마음이 보호자에게 들켰을지도 모른다. 그 마음은 분명 보호자의 마음과 같았을 것이며 그러다 보니 그럼에도 보호자는 수술 동의를 했을 것이다. 그런 믿음과 무색한 현실을 마주하면 무력함이 밀려온다. 어쩔 때는 그 이후 다음에 더 고칠 점을 떠올리게 하는 긍정으로도 가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했는데도 안되다니 정말 이건 안될 가능성이 높은 일이었다는 부정도 마구 만든다.
‘어차피 안될 일이었네요.’라고 말이 떠난 후 동료가 말했다. 그러다 정정했다. ‘아. 그때 산 말도 있었다면서요.’
나는 말했다. ‘그래. 지니자마. 지금도 잘 살아있지.’
문득 그 아이 보러 서쪽에 조만간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또 반복될 누군가를 또 맞이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