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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이란 무엇일까

by 말자까

예전에는 쉬는 날에도 주로 밖을 나돌아 다녔다면, 요즘에는 쉬는 날에 주로 집안에 있다. 쉬는 날에 집안에 있기 시작한 계기는, 불현듯 찾아왔다. 바로 이사를 하면서였다. 작년에 굉장히 깨끗하게 리모델링된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새하얀 이 전셋집을 일개 세입자인 내가 더럽히면 안 될 것 같은 일말의 책임감이 들었다.


결혼한 지 20년이 다돼 가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내 집안살림을 그다지 잘 들여다보지 않았다. 결혼 시작부터 지금까지, 양가 어머님들이 그릇이며 가전이며 서랍 정리며 뭐 그런 것들을 도와주셨다. 그런데 이제는 아이들도 커서 양가 어머님들의 발길도 뜸해지니, 내 주관으로 집을 마음대로 더럽게 놓아두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이 하얀 집이 나에게 집안 청소와 정리에 눈을 뜨게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동화 속 한 이야기가 가물가물 기억난다. 어떤 거지 아이가 새하얀 백합꽃을 한송이 얻게 되었다. 집에 가져가니 꽂을 화병이 없어서, 굴러다니는 더러운 병을 씻어 꽃을 꽂았다. 화병을 얹으니 책상이 더러워서 책상을 치웠고, 그러다 방을, 그러다 집 전체를 다 치웠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딱 내가 그랬다.


휴일마다 나는 부각된 더러움을 제거하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5일간 일하면서 나동댕이질이 된 집도, 내가 쉬는 날마다 꼬박이 정리를 하기 시작하니, 더 이상 예전처럼 더러움 레벨이 바닥을 치지는 않았다. 오전 내내 집을 청소하고, 오후에 깨끗한 거실을 감상하며 소파에 드러누우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그 맛을 이제야 알아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 나는 휴일에 집 밖의 모임이나 여행보다는, 집을 지키는 시간을 확보하는 걸 더 중요시하게 되었다.


청소와 빨래를 기계의 힘을 빌어 돌리고, 애벌 설거지를 해서 식세기에 넣고, 어느새 물때가 가득해진 화장실 청소를 벅벅 하고, 쓰레기를 주워 담고, 베란다를 정리하고, 건조된 빨래를 개어서 넣는 행위를 야금야금 한다. 물론 하루만 소홀하면 이 모든 정렬은 엔트로피의 법칙에 딱 들어맞게 순식간에 흩어진다. 누군가가 그걸 거스르는 노력을 매일같이 쏟아야, 사람 사는 집이 유지가 된다는 것을 나는 왜 이제야 알았을까. 누군가 어지르면 결국 누군가는 그걸 치워야 한다는 것을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전업주부였던 나의 엄마는 자식에게는 잔소리를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다. 엄마는 말없이 나를 쫓아다니며 치워주고 밥을 만들어주고 그릇을 씻어 주셨구나. 생색내지 않았던 그것은 사랑이었구나 깨닫게 된다. 며느리 집에 오면 뭐라도 더 해주고 싶어서 그렇게도 이불을 빨아대고, 냉장고를 뒤집었구나 생각하니, 현재 편안한 내 삶의 지분은 정말 많은 사람으로부터 왔음이 이제야 또렷해진다.


참 지지리도 외면하고, 이해하지 않으려 했던 타인의 영역들이, 어느 순간 내 안으로 훅 들어올 때가 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말처럼, 나에겐 이제야 그때가 도달했나 보다. 이건 부모의 사랑을 못 느꼈다고 늘 성역을 쌓았던 내가, 지루한 집안일을 매개로 숨겨진 사랑을 확인하고서는 이제야 부아가 풀리는 형국이다.


반짝반짝한 오늘의 내 집이 이제 휴일이 끝나는 내일부터는 또 서서히 무너질 것이다. 아이들이 어지르고, 남편이 어지르고, 나도 어지르고, 그러다가 또 다음 휴일이 돌아오면, 다시 원위치로 하나씩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 돌아갈 것이다. 이 루틴은 뭘까. 서운함과 억울함으로 정의하기엔 이제는 아쉽다. 돌릴 때마다 무늬가 바뀌는 요술망원경처럼, 무너지고 반짝거리는 것을 반복하는 지금의 이 리듬감이, 어쩌면 나중에는 그리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세상 밖의 경험과 장소에 대한 호기심보다, 집 안의 물건들과 고요함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는 요즘, 집을 혼자서 정리하는 아주 조용한 휴일이 이제는 외롭기는커녕, 한 주의 중심이 되는 안정감으로 다가온다. 어제 친구에게 '나 전업주부가 취향인가 봐'라고 말했다가 강한 반발을 들었는데, 정말 취향인지 아닌지는 남은 인생을 더 살고 봐야 알 일이다. 여튼간에 집안일 예찬 까지는 못하겠지만, 그 일(chore)은 요즘 의외로 나에게 ‘나쁘지 않은’ 감정을 나에게 하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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