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후 그녀는 정말 제주도에 왔다. 숨쉴틈 없이 일만 하던 친구는 이제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고, 좋은 호텔도 쉽게 예약하는 멋진 여성이 되었다. 우리는 진짜 오랜만에 조우했다. 10년 동안 친구에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친구는 정말 많이 변해 있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이. 변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녀는 회춘해 있었다. 일단, 체중을 아주 많이 감량했으며, 매일같이 5km씩 러닝하고 근력운동도 하며 출근하는 규칙적인 일상으로 산지 꽤 됐다는 것이었다. 내가 올해 들어서 운동을 시작하며 좀 감량했다고 깔짝대는 게 무색할 정도로, 그녀는 어마어마하게 단단해져 있었다.
이제 산에만 가면 된다. 그런데, 날씨가 영 받쳐주지 않았다. 일기예보는 산행 예정일도 역시 비와 구름이었다. 나는 백록담 가는 그 자체도 극한으로 힘든데, 날씨까지 흐리고 바람 불고 비 오면 얼마나 혹독한 극기 훈련이 될지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다소 길고 지루한 성판악 코스는 그저 백록담을 눈에 담는 것 하나만으로 가는 건데, 어차피 비구름으로 정상에서 아무것도 안 보이면 가는 의미가 없지 않을까 싶었다. 친구에게 등반 말고 제주도의 어떤 대안을 제시할까 궁리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도 강건해진 그녀는 백록담 보는 거 말고는 제주도에서 하고 싶은 게 딱히 없다고 했다. '가다가 내려오더라도 일단 가보자' 는 게 그녀의 최종 답변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에게, 내가 먼저 포기를 시킬 수는 없었다. 폭우가 아닌 이상 일단 고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엄청난 극기훈련이 될 것을 상상하며, 두터운 옷가지와 넉넉한 먹거리를 챙겼다. 기대보다는 비장한 마음이 앞섰다. 당일 새벽, 깜깜한 비안개 길을 뚫으며 새벽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다. 꽤 이른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이미 정말 많은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 이런 날씨에도 굳이 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하긴, 나 같은 도민이야 날을 고를 수 있지만, 전국에서, 아니 타국에서 이날만 기다렸던 사람들에게 선택지는 없던 것이었다. 어느새 나는 휴대폰으로 깜깜한 바닥을 밝히며 앞선 사람 뒤를 따라 친구와 등산로를 걷고 있었다. 다들 그렇게 궂은 날씨에 아랑곳 없이 의욕적으로 걷고 있었다.
새까맣던 등산로는 어느덧 점점 밝아졌다. 이제 아침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가 쏟아지지는 않아서, 우리는 등반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제 낙장불입이다.
성판악 초입은 완만하고 매우 길다. 한두 시간 이런저런 못다 한 이야기를 하며 둘레길 걷듯이 걷다 보니 첫 번째 쉼터가 나왔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아침거리를 살짝 먹었다. 친구는 바로 출발하자고 했다. 여기서 나는 감지하지 못했다. 그녀가 무언가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또 한참을 걷다 보니 진달래 대피소가 나왔다. 안개와 비가 조금씩 내리다가 사라졌다. 그래도 다행히 바람이 없어서, 새하얀 시야가 지루할 뿐 산행 자체가 힘들지는 않았다. 진달래 대피소 다음부터는 이제 진짜 경사의 시작이다. 워낙 사람이 많다 보니 우리는 앞선 사람의 뒤꽁무니를 바짝 따라가는 형태로 걸었다. 친구가 내 앞, 나는 그 뒤의 배열로 가고 있었다. 앞선 사람들의 그룹 중에는 속도가 늦은 사람들도 있었다. 친구는 늦은 사람들을 한 명씩, 또 한 명씩 제치기 시작했다. 나도 친구를 뒤따라 앞선 사람을 제치고 친구 뒤를 바짝 쫓았다.
사실 그동안 나는 산을 자주 다니지 않았고, 또 다니더라도 주로 혼자 갔었다. 왜냐하면 내 걸음이 워낙 늦고, 틈날 때마다 쉬면서 사진 찍고, 또 주위를 멍 때리며 보는 자유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친구와 네팔에 갔을 때에는 나보다도 이 친구의 속도가 더 늦었기에, 마음이 유일하게 편했던 산행 상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10년 전이고, 지금은 강산이 바뀌었고, 친구는 회춘했다는 걸 나는 미처 몰랐다. 심지어, 그녀가 산에서는 이제 다람쥐로 변신한다는 걸 나는 정말 몰랐다.
백록담에 가자고 쉽게 말을 던질 만큼 그녀는 산다람쥐로 대변신을 했는데, 내 속도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였으니, 우리는 점점 갭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내가 또 남 따라서 급하게 갈 성격도, 체력도 안되기에 그냥 내 속도로 갈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경사가 심해지는 어느 구역부터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조금 이르게, 나는 조금 늦게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여전히 날은 흐렸고, 바다가 보여야 할 시야는 하얀 백지 색깔이었다. 하늘 역시 구름이 가득 낀 회색 빛이었다.
정상 직전부터 안개가 잠깐씩 걷이기 시작하며, 아주 잠시 저 먼바다를 보여주거나, 파란 하늘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막상 정상에 올라가니 역시나 시야는 어두웠다. 친구는 한라산 정상에 이전에 몇 번 온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늘 흐리고 비가 와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번에도 역시 보지 못할 것 같다며 아쉬워하던 찰나, 주위에 사람들이 일제히 웅성거렸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백록담 쪽의 안개가 잠깐 걷힌 것이다. 그 찰나가 사라질 새라 다들 뛰어가서 일제히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와!! 라면을 먹던 나도 젓가락을 팽개친 채로 일행들 사이에 끼었다. 백록담뿐만 아니고 하늘까지 파랗게 보였다. 그야말로 조금 전까지 하얀 백지의 배경이었는데 백록담이 거짓말처럼 뿅 나타났다. 와!! 멋진 사진을 여러 장 건질 만큼 우리는 백록담을 잘 보고 마음껏 경탄했다. 처음으로 본다며 감탄하는 그녀의 행복감이 느껴져서 나도 덩달아 행복했다. 산다람쥐는 알고 보니 날씨요정이었다.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그녀가 나보다 살짝 빠른 것 빼고는. 아니, 내가 그녀만큼 빠르지 않다는 것 빼고는. 우리는 슬슬 내려갈 준비를 했다. 사실 성판악은 내려가는 게 더 힘들다. 내 체력은 고갈되었는데, 남은 길이 워낙 길어서 고생했던 기억이 성판악 코스에 대한 그간의 내 기억이다. 역시나 그녀는 나보다 잽싸게 내려갔다. 처음에는 몇 번은 나를 기다려 주다가, 중간 어딘가부터 그녀는 먼저 간다고 선언을 했다. 사실 나도 그게 편했다. 내 속도 그대로 가고, 그녀는 그녀 속도대로 가고. 한참을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워낙 갭이 커져서 친구가 이미 하산을 했을 때, 나는 아직도 내려갈 시간이 아직 한참 남았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또 각자 한라산을 잘 느끼고 돌아왔다.
밤이 되어 우리는 다시 만나, 친구 호텔 야외 수영장 자쿠지에 몸을 담갔다. 밤이 되니 비가 다시 내렸다. 비는 타닥타닥 수영장 물 위를 튀기고, 밤바람에 코끝은 시원하고, 피곤한 몸은 뜨끈하게 데워지고 있고, 바닷배까지 반짝반짝 보이는 제주의 야경은 참 예뻤다. 그저 행복했다. 우리는 정상에서처럼 또 경탄을 반복했다.
우리, 꼭 50세 기념 네팔 여행을 성사시켜 보자고 했다. 나는 우리가 속도가 다르더라도, 네가 먼저 롯지에 가서 쉬고 있으면 되니깐, 셰파가 있으니깐, 우리 지금처럼 같이 가자고 했다. 친구는 회춘해서 지금이라도 히말라야에 갈 다람쥐로 이미 변신 완료했으니, 나만 체력을 더 잘 관리하면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이렇게, 난데없이 다시 나타나 나를 제대로 자극시키고 있었다.
자극은 다음날에도 계속되었다. 친구 호텔 조식뷔페에 함께 했는데, 온갖 음식이 가득한 뷔페에서 각자 담은 접시를 보니 신기하게 종류가 비슷했다. 각자의 다른 삶을 살다가 어느덧 40대가 된 우리는, 신기하게 현재의 톤과 관심사가 생각보다 꽤 비슷해졌음을 느꼈다. 제대로 된 건강한 음식, 꾸준한 운동, 규칙적인 식사 등의 나를 위하고자 하는 관심사로, 그러니깐 '나'를 생각하는 삶으로 회귀하며 우리는 노화를 대비하며 40대의 한복판을 살고 있던 것이다. 너무 좋았다. 부어라 마셔라 술을 부어 넣어댔던 우리가 더이상 아니었다. 일에 치여 살다 돌아와서 야식으로 아무 것이나 욱여넣던 우리가 더 이상 아니었다. 직장과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며 방황하던 우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이제, 아무리 비싸도 원하는 걸 골라먹고, 배가 부르면 바로 포크를 내려놓을 줄 아는, 과거에 비해 제법 우아해진 40대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백록담 등반 제안이 말로만 끝난 게 아니고, 진짜 성공한 것처럼, 내가 호기롭게 제안한 50살 기념 히말라야 여행 역시 어쩌면 정말로 말로 끝나지 않고 진짜로 성사가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지금처럼, 우리 건강하게, 무탈하게 살면 될 일이었다. 어쩌면 그 일이 정말 어려운 미션일 지도 모른다. 삶에는 언제나 갑자기 복병이 튀어나오기에, 평범하게 늙는다는 것이, 무탈하다는 것이, 정말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걸 요즘 점점 실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50세가 되는 그 해에 네팔에 있을 것을 일단 믿어보기로 한다. 그녀는 대장 다람쥐, 나는 부대장 다람쥐가 되어서, 다시 히말라야의 땅을 밟아볼 것이다. 우리는 50살에도 그 춥고 불편한 롯지에서 버틸 수 있는 체력이 있을 것이며, 편안한 포카라의 어느 숙소에서 우아하게 고급 안주를 주문할 수 있는 재력이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그저 지금처럼 각자의 커리어에 맞게 똑같이 일을 하고, 루틴을 지키고, 나만의 시간을 잘 활용하며 나를 아껴주며 지금처럼 건강을 지키며 살면 된다.
마흔이 되던 해에 나는 인생의 큰 무언가를 떠나보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마치 고대하던 작품을 기다리듯, 나의 오십 이후가 더 기대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십, 그러니깐 지천명의 그 포문을 열어줄 우리의 네팔 여행이 더 기대된다. 그곳을 다녀오면, 또 혹시 아는가. 우리 환갑 기념여행 가자며, 또 10년간 날다람쥐로 회춘해서 더 열심히 살지도 모른다. 또 혹시 아는가 그녀가 근육짱이 되고, 내가 마라톤을 나갈 지도.
생각보다 삶은 길 수도 있다. 갑작스레 많아진 빈 시간이 낯설고 고독하기도 했으며, 매일의 의무와 루틴이 때론 지루하고 별 볼 일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위하며 행하는 그 반복적인 행위가 내 삶의 가장 단단한 다리 근육이 되어 나를 받쳐주고, 결국 관대함을 가져다줄 원천이 될 것 같다는 추정이 확고해졌다. 이미 행하고 있는 그녀를 직접 보니 더 큰 확신이 든다.
네팔. 그리고 나의 오십.
몇 년 안 남았다. 곧 보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