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부재 그리고 남겨진 숙제
죽으면 과연 끝일까? 죽음에 대한 해석은 종교관,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유신론자지만 어느 하나 종교에 나의 영혼을 매어 두진 않았다. 사실 살면서 가까운 가족의 죽음을 생생히 경험해 본 적 없는 나에게 아버지에게 찾아온 현실은 사실 당황스러웠다. 훗날 정말 부모님이 안 계시는 고향집을 여러 번 상상해 봤지만 와닿지는 않았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고향은 어린 날의 나의 추억도 같이 없어지는 기분이다.
부모님의 인생을 글로 정리하는 동안 우연히 웰다잉 지도사 공부도 같이 하게 되었다. 웰다잉 공부를 통해 그동안 글을 쓰며 느꼈던 알 수 없던 감정들이 자연스레 정리가 되었다. 오히려 새로운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죽음을 새로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앞으로 기술의 발전으로 200살을 산다 해도 죽음이란 것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죽음은 생명이 끝났더라도 끝이 아니다. 어쩌면 양자물리학 이론처럼 모든 건 원자로 시공간과 상관없이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내 안에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이 온전히 내가 창조한 게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의 아버지를 있게 한 그 강인한 개척정신에는 할아버지의 정신이 대물림되었다. 훗날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다 해도 그 정신이 나에게도 남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아이들에게도 자연스레 연결될 것이다. 죽음은 절대 단절이 아니었다. 그렇게 영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사를 지냈는지 돌아가신 조상님을 그리 귀하게 여겼는지 미신으로 여기던 나의 해석 방향이 달라졌다.
나는 이제 새로운 관점으로 죽음을 바라보니 나의 일상도 달라졌다.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고 지금 옆에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달리 보였다. 여전히 좋은 점보다 부족한 점이 눈에 띄어 지적하고 싸우지만 가장 근본적인 존재에 대한 감사함이 생겼다. 예전에는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감사는 없었다. 늘 같이 사는 가족이 오늘도 살아있네라며 감사하는 일은 일상에서 흔한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오히려 남편이 뜻하지 않는 돈을 주거나 아이들이 성적이 좋을 때 우리는 솔직히 더 나은 결과에 감사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면 나의 마음도 달라진다. 지금의 삶이 힘들고 지쳤다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의 내면부터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기는 힘들어도 우리 마음을 바꾸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 뒤로 나는 효에 대한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쇠약한 부모님을 보살피는 강제적 의무라기보다는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때가 되면 죽음을 맞이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부모님의 죽음을 슬픔과 애달픔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그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봐야 한다. 누구나 인간은 지금보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꾼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모님의 죽음을 통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되새겨 보는 기회로 봐야 한다.
자식이 힘들면 사실 부모님의 마음도 괴롭다. 서로에게 미안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각자의 삶을 잘 살아야 한다. 정말로 영혼이 있다면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면 죽고 난 뒤에도 부모님은 자식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계시지 않을까? 천국에서도 살아 있는 자식을 보며 흐뭇해하실 부모님을 상상해 보자.
글을 처음 쓸 때와 마지막 장을 쓰는 지금의 나는 죽음에 대한 무게가 달려졌음을 느낄 수가 있다. 더 빨리 글을 쓰지 못한 죄책감이 들었던 예전의 나는 죽음을 단절로 바라보았다. 지금의 나는 그 반대인 무한한 연결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가족 에세이를 쓰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부모님에게 마지막 제일 큰 유산을 받은 기분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님이 스스로 자서전을 쓰며 인생을 정리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 글을 쓰며 정리하기 힘든 부모님이 시거나 이미 돌아가셨다면 자녀가 그 정신을 이어받아 글을 쓸 수 있다. 부모님 인생에 대한 글을 쓴다면 분명히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자신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달라진 관점이 지금을 살아가는 자신에게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기분일 거라고 말이다.
가장 가까운 아니 하늘이 맺어준 천륜이라고 하는 부모자녀 관계에 문제가 많아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부모 자식 관계 단절을 손절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효 문화를 중시하던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세월이 달라졌고 사회가 달라지고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시대는 맞다. 하지만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는 달라질 수 없다. 그게 천륜이 아니던가? 부모님이 행복하시면 자식도 행복하기 마련이다.
예전의 효>에 대한 정의는 사실 바쁜 지금을 살아가는 자녀들에게는 부담 자체가 될 수 있다. 부모님을 모시며 노후를 책임지고 훗날 제사도 지내야 하는 그런 효는 지금 시대에 지킬 수 자식이 많지는 않다. 대신 살아 계시는 동안 부모님과의 원활한 소통 그리고 교감을 넘어 공감할 수 있는 관계가 된다면 어떨까? 그야말로 마음으로 교감할 수 있는 사이가 된다면 돌아가신 뒤에도 부모님은 연결된 존재로 나의 수호신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해보며 나는 오늘도 아버지에게 지혜를 달라고 부탁드린다.
아버지의 부재, 그리고 남겨진 숙제
2025년 7월 8일, 아버지는 끝내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처음에는 죽음 그 자체의 힘든 슬픔과 아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 문득문득 아버지와의 추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고, 그때의 온기가 지금 내 곁에 머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님을 몸소 체험하는 나날이다.
더 신비로운 일은 아버지가 엄마와 나의 꿈에 여러 번 찾아오셨다. 특히 엄마가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꿈에 아버지가 찾아오신 것도 신기했다. 나의 꿈속에 아버지는 우리 아이들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고는 다시 길을 떠나셨다. 엄마의 꿈속에서도 아버지는 여러 의미심장한 장면을 남기고 가셨다. 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다, 여전히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무언의 위로였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떠나신 뒤, 현실의 공기는 차갑게 변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던 '현실적인 문제'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남겨진 엄마의 평온한 노후와 육 남매의 화합을 바라셨던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우리는 예상치 못한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기려 했던 것은 과연 '재정적 유산'이었을까, 아니면 '지혜의 유산'이었을까. 우리 가족에게 닥친 이 현실적인 숙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부모님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매일 고민한다.
어쩌면 이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아버지가 내게 주신 마지막 수업일지도 모른다. 그 길을 찾는 과정에서 얻게 될 새로운 경험은 결국 나를 또 다른 지혜로 인도할 것이다. 실패도 성공도 모두 삶의 귀한 재료다. 나는 이 시련을 발판 삼아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를, 그리고 우리 가족이 다시금 본질적인 사랑을 회복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