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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서율 Feb 12. 2024

내 낡은 티켓북

식스 센스 - 19990922 수요일

얼마 전 서울 집에 다녀오면서 잊고 있었던 보물을 찾았다. 드디어 방청소를 했다며 예전 내 방을 쓰는 동생이 찾아준 내 낡은 티켓북이 그것이다. 다이어리, 교환일기, 스크랩도 참 많이 하던 90년대 중반에 나는 좋아하는 영화나 공연들을 보고 나면 그 티켓을 소중히 모아 왔다. 이 티켓북에는 1994년도부터 2009년 정도까지의 종이 티켓이 나름 잘 보존되어 있으니 15년 간의 내 기억들을 찾아가 보는데 도움이 되는 도구가 될 것 같아서 소중히 들고 지금 집에 왔다.


이 티켓들을 모으면서 나름 자신 있어했던 게 있다. 영화를 함께 본 사람들, 그때 가졌던 생각들, 그때 내 모습을 잃지 않겠다 했었다. 역시나 교만했던 치기였다. 기억은 얼마나 조작되기 쉬운가. 사람은 자기가 특별히 좋았거나 슬펐던 것들만 안고 가는 것 같다. 그래서 살 수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진 한 장으로 남은 기억들에 대해서 조금 써 보고 싶어서 적는다. 부르스 윌리스가 출연했던 영화 ' 식스 센스'는 개봉 당시 엄청난 반향이 있었다. 이 영화에 가장 중요한 키 포인트는 스포일러에 노출되지 않은 채 영화관에 가는 것뿐이었다.


서울에서 가장 처음 생긴 멀티플렉스 극장 근처의 독서실에 다녔던 나는 비가 추적추적 오던 이 날도 고등학생으로서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해, 평일 밤에 학교 수업과 야자와 추가 학원 수업까지 끝내고 내 작고 좁은 칸막이 속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생각이 너무 많아서 쉴 틈이 필요했는지, 심야 영화를 상영하는 도보 15분 거리의 영화관으로 도망쳐야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내 기억에 나의 우산은 노란색이어서 적어도 도로에서 차에 치일 염려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당돌한' 범생이었던 나는.... 아주 가끔 학교에 거짓말을 하고 영화관으로 땡땡이를 치곤 했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말 내 책상 위에서 숨이 안 쉬어질 때, 병가를 내고서 엄마가 싸주신 점심 도시락을 들고 어두컴컴한 한낮의 영화관으로 향했었다.


고등학생 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상실의 아픔이 내겐 있었다. 아직 어렸던 나는 그 감정들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영화관의 어두컴컴한 공기 속에서 조용히 산화시켜 아주 작은 한 덩어리로 마음속에 쌓아왔던 것 같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방법이었다. 영화관에서 본 내 인생 최초의 영화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이리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은 언제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 건 어찌 됐든 좋았다. 새벽 1시 언저리에 시작한 영화 '식스 센스'는 오감을 모두 건드리는 으스스한 영화였다. 아이가 조용히 읊조리다가 후반부에서 터져버리는 진실은 슬프고도 무서웠다.


영화관에서 보는 모든 영화 중에 단연코 나는, 공포영화를 제일 좋아했었다. 인간이 가진 모든 감정들 중 가장 솔직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리고 초자연적인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것 또한 가족이나 진실된 사랑밖에 없다고 그려지는 대부분의 공포 영화를 보면서 비슷한 것을 갈망해 왔다. 감정을 박제하지 않으면 해야 본분을 다할 없다고 생각했었던 시절에, 공포영화를 보면 실컷 소리라도 지를 있어서 좋아했던 걸까. 노란 우산을 들고 독서실로 터벅터벅 걸어오던 나는 퀭한 얼굴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후로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는 부지런히 챙겨봤지만, 최근작 'Old'랑 '23 아이덴티티' 말고는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영화가 별로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1999년도 가을에 내가 가둬놓고 보지 않으려 했던 감정은 '분노'였다. 나는 내게 최초의 상실을 가져다준 환경에 대해 걷잡을 수 없이 분노하고 있었고,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어찌할 줄 모르고 헤매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 울면서 뭔가를 엄마에게 조르면 크게 혼났던 기억이 있어서, 자라면서는 화를 낼 줄 모르고 삭히는 게 자연스러운 아이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나쁜 버릇인지는 더 시간이 흐르면서 경험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만큼은, 이야기에 동조해서 마음껏 화도 내고 웃을 수 있는 찰나의 자유를, 마치 내 것인 것처럼 알았던 시절의 나. 짧은 머리의 눈이 까만 아이가 내 기억 저편에서 아직 가만히 서 있는 것 같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때의 나는. 그것들을 추억하는 것이 지금의 내게 도움이 될까. 쓰다 보면 알게 될 것 같다. 내 낡은 티켓북 속의 이야기들과 덮어두려고만 했던 내 모습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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